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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은영 시인 / 오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1.

송은영 시인 / 오늘

 

 

한 편의 시도 쓸 수가 없다

나는 몇 시간째 접속을 시도했다

시 자체를 싫어하는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캔맥주를 마시거나

리모컨을 돌렸다

나는 그러건 말건

눈이 바지게 하얀 백지를 클릭했다

 

시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나도 모른다

마음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동네 몇 바퀴를 돌고

하릴없이 깡통을 차다가

마침내는 지루해졌다

저만치 구름이 별볼일없이 지나가고 있다

 

시는 오지 않고

아무도 나를 읽지 못할 때

먹물이 소용없는 심해 문어들은,

거꾸로 발광물질을 지니고 다녔다

 

제2회 〈시와 상상〉신인상공모 당선작

 

 


 

 

송은영 시인 / 춤추는 거미

 

 

녀석의 덩치는 생각보다 크다

불가항력의 길고 검은 다리를 어슬렁거리며

독설을 퍼붓는데

능수능란한 늪이다

 

정중앙에 소실점을 찍고

걸리면 절대로 빠져 나갈 수 없게

자신의 영역을

철저하게 위장하여 울타리를 친다

 

허방에 포박된 약자들이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친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듯

녀석 특유의 앙팡지고

끈적한 당당함에

사람들은 제물이 된다

 

호기심을 무기삼아

사시사철 참을 수 없는 순간을 급습하는

초강력 거미줄은

늘 신선한 사냥감을 향해 미친듯이 발사된다

탕. 쩍

 

 


 

 

송은영 시인 / 고래

 

 

트럭에서 고래가 내려온다

남태평양을 향해 울었는지

눈 밑에 마스카라가 번져

새끼들이 떠난 자궁까지 검붉다

몸 전체를 꽁꽁 묶은 바코드 자국

사람들이 몰려오고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심해로 줄줄 흐르던 혈관이

한 순간 파편처럼 튀어 분수가 된다

어판장 위로 햇빛이 쏟아져

고래의 양 지느러미가

곱게 돋아난 무지개빛 날개처럼 보인다

잠시 눈물 속을 유영하던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건가

고래의 몸이 환하게 열리고

캄캄한 바닷물이 천둥소리를 내며

비루한 잠을 깨운다

죽음을 거쳐 간 시간이

수초처럼 흔들린다

껍질 벗은 상처는 좋아라, 뛰어다니고

번식이 끝난 고래는

몇 안 남은 공기를 정성껏 마시며

짧은 제 생을 묵념하고 있다

 

 


 

 

송은영 시인 / 서기2000년 선녀

 

 

아이 두 명 키울 때까진 날개옷 입지 않겠다던

나무꾼과의 약속을 뼈저리게 되새기며

푸른 정기를 받아 몰래 비상을 꿈꾼다

나는 선녀였을까? 제법 실한 생활의 잔뿌리

해 거듭될수록 모양새가 갖추어진다

나무꾼의 외마디에 마주 소리를 지르고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때운다

눈 밑의 기미를 분첩으로 치며

또래 아줌마들 모임에 나가

한나절 허영을 떨기도 한다 그 사이

보일러가 자동으로 데워져 방이 후끈거린다

중독처럼 인터넷을 켜고 날개옷을 뒤진다

형편에 맞춰 배달된 옷

각종 카드 명세서 위로 김치 국물이 떨어진다

마이너스 통장이 참외 배꼽처럼 마중 나와

배달된 옷이 문득 초라해 보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나무꾼의 불호령을

날개옷과 맞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밀린 세금 고지서가 눈처럼 쌓여 아파트 입구를 가린다

알고 보니 나의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신용불량자로 마냥 돌려 막은 것이다

 

 


 

 

송은영 시인 / 거꾸로

 

 

딱똑

뒤로가는 분침

뒤로가는 시침...

거꾸로 타는 보일러가 연료비도 싸고

 

福도 거꾸로 부쳐야 잘 들어오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재미있고

연어도 강을 거슬러 오르고

고래도 거꾸로 새끼를 낳고

참새가 거꾸로 날아 새참이 되고

아 좋다 좋아와 다시 합창 합시다는

거꾸로 읽어도 같은 글자고

불운이 거꾸로 행운이 되고

용의 긴 목에 거꾸로 박힌 비늘을 건드리면

그 누구라도 용에게 잡아 먹히고

영국에서는 왕이나 여왕이 그려진

우표를 거꾸로 붙히면 반역죄가 되고

나이를 거꾸로 먹은 사람들이

거꾸로 엎어놓은 항아리처럼

위아래 구분없이 살아가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어른들이

아이처럼 내려다 보며살고

물속에 물구나무 선 달이

고무신 거꾸로 신고 달아나기 바쁘고

새장 속 새는 어항속에 있고

어항 속 물고기는 새장 속에 있고

땅은 하늘에 펼쳐져 있고

하늘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고

 

 


 

 

송은영 시인 / 경찰서가 망했다

 

 

사람들이 쓸만큼 돈을 벌어

놀고먹는 게으름뱅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도 자식을 버리지 않았고

자식도 부모를 버리지 않아 행복하단다

어제까지 사기전과자였던 사람들이

피 보일 상대가 없어지자

평범한 이웃이 되었다

교회당 십자가 밑에는

안식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리하여 우리 동네는

이날 이후로 사건 사고가 사라졌다

출근해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경찰들이

눈치밥을 먹다가 하나 둘 사표를 냈고

급기야 세계동 네거리

노른자 땅에 점포 세를 붙였다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납작 엎드린 경찰들은

전성기의 이름값을 분칠하다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지

자신을 여러 번 개종했다

경찰서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미치고 팔짝 뛰지 않았다

 

 


 

 

송은영 시인 / 별것 아니었다

 

 

암탉들이 모이를 쪼다가 진주를 발견했다

이 진주를 어떻게 할까

머뭇머뭇 거리다 수탉에게 보여주었다

수탉은 낼름 삼켜 버렸다

꿀꺽 넘어가는 소리

별것 아니었다

 

 


 

송은영 시인

1969년 포항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2007년 <시와 상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한국작가회의', '시산맥', '영남동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별것 아니었다』화남출판사, 2013. 현 방과후 초등학생 글쓰기 논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