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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애 시인 / 가을, 바람개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1.

고정애 시인 / 가을, 바람개비

 

 

아이가 들고 간다

빙빙 도는 바람개비

쉬임 없이 내 안, 내 살갗 안에도

바람이 더운 김을 돌리고 있다

 

할머니는 물레바퀴 빙빙 돌리셨다

하얀 목화솜 더미로 쌓아놓고

저 남쪽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옹도

노상 물레질로 올실을 뽑았다

 

세월이랑 사연이랑

꼬이며 당겨가는 날줄을 베었다, 얼레에 감았다

얼레를 빙빙 돌려 당겼다 풀었다

잡았다가 통줄 주어 꼭지연을 띄웠다

윗바람에 둥둥 하늘에서 춤춘다

 

하늘 막은 물꼬 튼다

내려오는 낙수물로 물레바퀴 돌린다

이가을에 찹쌀 묍쌀 방아로 곱게 찧어

누군가 맞을 채비 서둘러 하고 있다.

 

 


 

 

고정애 시인 / 물과 얼음

 

 

 얼음덩이를 물에 던지니 쨍! 하며 물이 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섭씨 영하 30。후리져에 들어가 냉기로 굳어버린 머리 허리 팔다리가 순한 물에 안겨서는 몸을 뉘인다 기지개를 맘껏 켜보인다 이윽고 한 마음 한 몸으로 어울렸는지 저희끼리 깊이 껴안고 있다.

 

 


 

 

고정애 시인 / 게이트 맨*

 

 

외출하고 돌아와

암호 숫자를 입력하는데

반응하지 않는 게이트 맨

널브러진 게이트 맨

새 배터리로 배를 채우자

퍼뜩 깨어나

비로소 작동하는 게이트 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배고프면 세상만사 다 싫다

다 귀찮다 널브러지는

나와 똑 같은 로봇

게이트 맨

 

*게이트 맨: 현관 개폐기의 상표

 

 


 

 

고정애 시인 / 격세유전隔世遺傳

 

 

문득 들여다본 거울에는

야윈 볼, 주름진 노인의 얼굴

입혀주고 업어주고

달래주고 먹여주고

밤길에서

빗자루도깨비랑 몽달귀신과 만나

길동무한 얘기해주시던,

또 해줘 또 해줘

응석을 부리면 그래그래

되풀이 들려주신 우리 할머니.

내가 두드러기로 괴로울 때

주문呪文 외워 낫게 해주신 우리 할머니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지금 나와 무척 닮은 우리 할머니

 


 

고정애(高貞愛) 시인

전남 목포에서 출생. 목포여고 졸업(제1회), 연세대 번역작가 일어과정 수료. 『시와 의식』을 통해 문단 데뷔. 일본 계간 시지 『ゆすりか』 동인. 시집; 『사랑 에너지』『연필깎기』『튼튼한 집』등. 『한국시 35인선』 등 일본어로 번역 출간. <시아카데미 동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2011년 제3회 바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