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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호택 시인 / 거짓말처럼 봄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1.

심호택 시인 / 거짓말처럼 봄이

 

 

대지는 초록빛

원피스의 마지막 단추를 푼다

 

잎새들 사이

버찌가 익어

까만 브로치들 반짝이고

 

꿀벌이 교실에 들어와 붕붕거리는

유월은 눈이 부시다가

아프다

 

거짓말처럼 봄이 갔어

산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거기

 누군가 있어 중얼거리지만

 

아니다

삶이란 별나게도 참다운 데가 있어

거짓말처럼 떠나간 봄이

어느 날

고스란히 돌아오리라

 

 


 

 

심호택 시인 / 투명

 

 

가을날이었다

들판에 뻗친 흰 물줄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그런 날이었다

사람들이 나더러 내성적이라던

고등학교 2학년

내 자전거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시내들 앞에 뽐내며

멋들어지게 커브를 꺼다가 그만

화다당 넘어지고 말았다

 

먼 밭에서

어머니는 가슴이 덜컥했다고 한다

보이지도 않는 밭에서

녹두를 거두고 있던 어머니는

그 소리가 내 소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심호택 시인 / 이십년 후

 

 

쪼그만 가시내 하나 때문에

예배당 종소리 한 번도 안놓쳤다.

만날 수 있을까

새벽 잠 떨치고

논두렁 헤치며 달려갔다.

 

그로부터 이십년

나는 나에게 묻는다

오늘도 그 종소리 들려오냐고

어푸러지며 고꾸라지고

달려갈 거냐고

 

 


 

 

심호택 시인 / 겨울 편지

 

 

아픈 건 그러저럭 나았소

올해도 김장 몇포기 담갔소

 

사랑이여

당신이 사준 고동색 파카는

시골집 수도펌프가 입게 되었소

 

심호택 유고시집 / 원수리 시편(창비, 2011) p 72

 

 


 

심호택 시인(1947~2010)

1947년 전북 옥구 출생. 외국어대 불어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1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빈자의 개」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1992년 첫시집 『하늘밥도둑』 간행. 1995년 두번째 시집 『최대의 풍경』과 『미주리의 봄』 『자몽의 추억』등을 간행. 원광대 불문과 교수 역임. 2010년 1월 30일 교통사고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