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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택 시인 / 거짓말처럼 봄이
대지는 초록빛 원피스의 마지막 단추를 푼다
잎새들 사이 버찌가 익어 까만 브로치들 반짝이고
꿀벌이 교실에 들어와 붕붕거리는 유월은 눈이 부시다가 아프다
거짓말처럼 봄이 갔어 산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거기 누군가 있어 중얼거리지만
아니다 삶이란 별나게도 참다운 데가 있어 거짓말처럼 떠나간 봄이 어느 날 고스란히 돌아오리라
심호택 시인 / 투명
가을날이었다 들판에 뻗친 흰 물줄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그런 날이었다 사람들이 나더러 내성적이라던 고등학교 2학년 내 자전거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시내들 앞에 뽐내며 멋들어지게 커브를 꺼다가 그만 화다당 넘어지고 말았다
먼 밭에서 어머니는 가슴이 덜컥했다고 한다 보이지도 않는 밭에서 녹두를 거두고 있던 어머니는 그 소리가 내 소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심호택 시인 / 이십년 후
쪼그만 가시내 하나 때문에 예배당 종소리 한 번도 안놓쳤다. 만날 수 있을까 새벽 잠 떨치고 논두렁 헤치며 달려갔다.
그로부터 이십년 나는 나에게 묻는다 오늘도 그 종소리 들려오냐고 어푸러지며 고꾸라지고 달려갈 거냐고
심호택 시인 / 겨울 편지
아픈 건 그러저럭 나았소 올해도 김장 몇포기 담갔소
사랑이여 당신이 사준 고동색 파카는 시골집 수도펌프가 입게 되었소
심호택 유고시집 / 원수리 시편(창비, 2011)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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