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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성운 시인 / 방자유기 마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0.

홍성운 시인 / 방자유기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투명한 구슬입니다

동그랗게 감아내어 실핏줄도 환합니다

더 이상 응축치 않는

사리 한 과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해맑은 샘물입니다

눈동자 씻어 주며 마를 줄을 모릅니다

사랑이 방전될 때는

늪물인 듯 넘쳐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가을 하늘입니다

우레로 다져진 방자유기 하늘입니다

상처도 장인을 만나

저렇듯 별이 됩니다

 

 


 

 

홍성운 시인 / 담쟁이

 

 

위험해요

맨손으로

벽을

타 오르는 건

 

믿음이지요

한 가닥 자일에

목숨을

내맡기는 건

 

기어이

쏟아붓네요

서늘한 별빛 몇 섬

 

 


 

 

홍성운 시인 / 이어도, 낮은 불빛은 타오르고

 

 

 바다를 곁에 두고 살아본 사람들은

 수평선이 발행한 주식을 배당받아

 이따금 어시장에서 시세를 가늠한다

 

 주가가 낮으면 낮은 대로 견디어 온

 흉어의 자맥질에 불안한 물새들아

 섬 하나 젖은 꿈자리 미리 찍어 두었다

 

 성산포 해가 뜨면 이어도에 달이 뜨고

 한림항에 바람 일면 이어도는 출어하네

 누구냐 시장 개입해 상한가를 들먹이는

 

 매각한 이 없어라 반딧불만한 생각 하나

 시원의 물결 따라 떠 흐르는 섬이여

 까치놀 낮은 불빛이 난바다에 가득하다

 

 


 

 

홍성운 시인 / 누님의 쑥

 

 

백두대간 휘돌아 내려 상주시 외남면에

새둥지 햇살을 품는 소상마을 나앉았다

이 마을 터를 일구며

누님이 살고 있다

 

집은 오십여 호, 층층이 논다랑이

곶감마을 이름만치 감나무가 지천이고

한차례 소나기 같은

복사꽃이 한창이다

 

4월 끝자락엔 가마솥에 불 지핀다

쑥이나 머윗잎, 두릅이나 가죽나무

풋풋한 산나물 내음

집집이 새나온다

 

갓 짜낸 들깨기름, 쑥인절미 한입 물면

산골에 왜 사냐고 누가 물을까만

내 누님 요즘 시에는

쑥 향이 솔솔 난다

 

 


 

 

홍성운 시인 / 고로쇠나무에게

 

 

2월 한기 가신 날

너의 체액에 내가 취했다

 

 예전에 너를 몇 번 만났어도 그냥 단풍나무라 여겼다. 어느 친구가 고로쇠나무라 귀띔한 순간, 두툼한 면장갑을 낀 듯 입맥 사이사이 살점이 보였다. 아쓱한 계곡 바람에도 홍조를 띠던 네가 용케도 전라로 겨울을 났구나. 저 중동에 전운이 감돌던 2월, 점령군처럼 나는 너의 물관에 드릴을 댔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 눈물이다. '헌혈 한번 못해본 내가 수액을 빨다니...' 구토다. 마른 잎 짓이겨 상처를 막았다.

 도시들 바스러지는 3월, 신음이 멎었는지 가지가지 혈색이 핀다. 눈웃음 같은 이파리들 무성히 돋아날까.

 

나무야 정말 미안하다

너를 채혈해 갈증을 풀다니

 

작가 (2003년 여름호)

 


 

홍성운 시인

1959년 제주시 애월읍 봉성에서 태어나 199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으로 <숨은 꽃을 찾아서> <상수리나무의 꿈>이 있으며, 시화집으로 <마라도 쇠북소리>를 펴냈다. 2000년 제19회 중앙 시조대상 신인상을 받았으며, <역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