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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위 시인 / 가장 쓸쓸한 역
신설동역에선 스카프를 고쳐 맬 동안에 장갑을 잃었다. 살갗에 지퍼를 달자 호주머니가 몸 안에 있을 때
내가 잃어버린다라는 말과 이별할까?
허순위 시인 / 그 길은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외발로 멈추어 선 저녁 계단. 발바닥 밑으로 중력이 바뀌어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말 누군가 공중에 흩뿌려 놓은 포플러 잎사귀들같이 푸들거리는 슬픔과 불안의 공기를 뚫고 멀리 아득하다. 맡은 역의 대사는 아직 못 다 외웠지만, 기나긴 저녁을 두른 내 옷은 툭, 툭 끌러 터진다. 계단 밖의 남자가 운다 못을 박으며 계단 안의 여자가 운다 못을 뽑으며 노란 현기의 즙 발린 이마에 뜨는 햇살마다 조금씩 묻은 피를 훔치고 집으로 가는 길. 부글거리는 거품의 계단에 서서 시계 속에 나른하게 흐르는 어둠의 시침, 배반의 분침 그리고 상실의 초침… 낀 먼지 뽀얗게 떠들어대는 저녁이 긴 창의 집에 돌아가고 싶다. 조금 조금 조석으로 갈아쓰는 안경과 안경 사이 부푸는 시력의 차이만큼 사물의 가장자리 둥글게 휘어지는 안개의 매듭을 풀어 나아가자면 지키지 못한 내 생애의 약속들 계단마다 벽처럼 우뚝우뚝 치솟아 오르지만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은 나의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허순위 시인 / 봄눈
가느다란 꽃가지가 휘어지도록 봄눈이 왔다 봄눈이 겨울을 못 벗는 집들 위에 왔다 아침을 열고 2층을 열고 후리지아를 풀어 쏟으며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저 눈도 아침을 열고 어디로 나가는지 땀을 흘리는 듯 만원 버스를 타고 뛰고....함박눈 퍼붓는 샛길론 잃어버린 수첩 속 어디선가 머리 끄덕이며 졸던 이름들,발톱 없는 짐승의 기억으로 찾아올 것만 같은데,엷게 저민 무우의 켜켜에 눈물 같은 것이 찔금거렸다. 저 눈같이 닿자마자 울어볼 따뜻한 숙박부에 본명을 적고 자고 싶다. 맞은편 집들의 버려진 측면,부풀어오르고 겨울의 끝에 내리는 눈은 눈이 아니라더라 멍든 엄지발가락을 싸맸다.새벽 빈 터 찾아 토악질하던 병든 그리움으로부터 몽상이 돌아와 자리를 펴는 아침,어둑한 꽃밭 안에서 동트는 곳으로 두 손 들고부르던 나,눈을 떴다 봄이 왔다.기어코 오는 봄에게 딸꾹질하던 온몸을 내어주자 까맣게 말라도 봄은 돌아와서 마지막 꽃가지를 흔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가.사방에 종소리들이 울리고 축포마냥 변방의 나뭇가지들은 곧 화사하리라.
허순위 시인 / 가짜시인의 노래
백과사전같은 중견이거나 통도사나 직지사같은 원로들 들으면 활짝 웃으시겠지만 고래 옆의 새우도 새우의 비통함에 울듯 난 가짜였어 그저 무엇인가를 쓰고 싶었지 굳이 시는 아니었는데 어느새 노란 하늘 밑에서 노란 꽃 머리에 이고 시인이 되어 있었지 그러고도 한 얼마간 가던 길 더 가다가 어느날 보니 꽃이 없었어 만상이 깃들었다는 마음이 보이지 않았어 아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다는 거야 아마 시신경을 조이던 콘텍트렌즈 탓이었을까 사막의 붉은 노을이 헛배처럼 불러오네 사막 끝 어디에 잠근 호수라도 있을까 어떤 마술 같은 사물의 빛 속에서 우주를 뜯어먹고 구름의 피를 빨고 너를 괴롭히고 나를 뼈처럼 뜯어먹었던 거야 그렇게 무서운 하늘 밑을 걸어왔다고 해도 렌즈를 빼고 나면 머리 위 한 줄기 관념적 사랑의 황금능선이 걸리는데 그 아래 투명인간처럼 내가 안 보이는데 누가 이 그믐밤에 당신을 찾아가는 걸까 아침을 쏘아죽이고 싶고 아침에 플라터너스 밑에서 고추씨를 먹고 있는 저 비둘기떼를 쏘아죽이고 싶은
<현대시, 1996년 4월호>
허순위 시인 / 풀이 된다는 희망은
마른 스펀지 같은 이곳에 뿌리 내렸다는 것인가. 작은 순간조차 풀꽃을 향해 포복해 가겠다는 그것, 좋은 소식인가. 흔들리고 밟히고 꿈틀거리는 가축의 밥도 못되면서 긴 손가락과 찢어진 살 바람에 푸들거리면서 더러는 시도 잊고 살 일이다. 우연히 감는 눈까풀 위에 황초는 스멀스멀 유혹의 혀 낼름거리지만 묘지의 꽃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실신한 듯 견디며 듣는 저 투명한 종소리 이제 두려움이 없고 길 없는 하얀 꿈이 쓰러지는 낯선 곳에서 듣다니! 여기서 길 되찾기란 없다. 풀이 된다는 희망은 부탁이다, 나는 부디 치욕스러워 몸으로부터 오는 나의 삶을 믿지 말자는 쓰러지며 가슴에 핀 파르스름한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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