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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금기웅 시인 / 반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0.

금기웅 시인 / 반성

 

 

낡은 아파트 담장 장미 가득 핀 옆으로

어린아이 하나 울며 지나간다

두 눈에서 질금질금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느라

꽃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끝내 가까이 다가가서

왜 슬피 우는지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길가에 가만히 서 있는 내 옆을 그 애가 지나간다

시인의 똥은 메마르고 다 썩어서 개도 안 먹는다는데

저 어린 작은 슬픔도 달래주지 못하는 주제에

시를 써서 도대체 무얼 어쩌자는 것인가

그저 남의 슬픔을 구경만 하고 다니며

아픈 현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이

고작 시를 쓴다는 자의 할 일인지

시정잡배만도 못한 자신이 슬퍼 운다

나도 그 나이 때쯤 무척이도 울었던가

배고파서 울었고

중학교 정문 게시판에 철 따라 등록금 미납자로 올려진

이름 석 자를 보면서 울음을 삼킨 적이 있다

자세히 보면 장미처럼 화사한 꽃들도

하나같이 검은 벌레들로 깊은 병이 들어 있다

 

오늘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못하고

허상들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나를 반성한다

 

 


 

 

금기웅 시인 / 안심

 

 

툭 떨어진 밤 한 송이

등산화로 꾸욱 눌러보았다

터진 빈 껍질 속의 욕망만 바닥에 뒹굴었다

맑은 햇살 쪼이며 몇 개의 잎새로 버티고 있는

가을 밤나무 뒤에서 까만 청설모 한 마리 조그만 입으로

껍질 터진 가을 하나 가득 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쳐다보고 있다

의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미소를 보내자

내 안심을 그제야 보았는지

그 둥근 시간을 두 손으로 안고 이리저리 굴리며 껍질을 깐다

낙엽을 깔고 앉아

이제 온 산 가득 쏟아져나오는 말의 잘 익은 알맹이들을 먹는다

놈은 내 미소 냄새를 맡았고

대신 나는 놈이 둥근 시간이 되어가는 걸 훔쳐보았다

서로 안심을 나누었다

 

 


 

 

금기웅 시인 / 아픈 달

 

 

1

어둑해진 거리에 서 있었다

까만 추억같이 단단해 보이는 고집이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물렁해진 저녁을 물고 우물거리며 오래된 상가 앞을 걸어갔다

 

골목 끝 순대국 집 가마솥에서

허연 거품을 내품으며 버둥거리는 돼지머리처럼 이제 아주 잊기로 했다

하늘에는 반달이 떠 있었다

 

2

그녀 몸에서 하얀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로의 가로수에서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가 아픈 몸과 노곤했던 하루를 쉬어가기를 바랬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걸어갔다. 가슴을 식히려고 심호흡도 길게 해 보았다.

 

하늘을 보았다. 그녀가 반쯤 잘린 채 떠 있었다. 그녀 몸이 빨리 회복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녀가 밤의 손을 잡고 물먹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고여 있던 기억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문득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단지 여행자였던 것이다.

 

-<애지>, 2017년 가을호에서

 

 


 

 

금기웅 시인 / 옹이

 

 

기어다니는 삶들은

제 가슴 근처에 옹이를 만든다

옹이는 나무의 긴 꿈틀거림과

참을 수 없는 기다림이 진액으로 모아진 것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빛나고 있으나

가만히 쓰다듬어보면

한 덩어리 슬픔으로 저마다 옹골지게 뭉쳐 있다

그렇게 고집으로 움츠려 있다가

누구도 외면할 때면 폭발하듯 튀어오르리라

불룩 튀어나온 말 발목처럼

어느 날 몸을 가르고 뛰쳐나올 것이다

용기는 늘 시공을 초월하여 있는 법

움츠려든 속을 모두 꺼내 보여주려 할 것이다

안으로만 뭉쳐진 그를 그려낼 수 있다면

아침 산에 주저앉아 침묵을 삼키지 않아도 되리라

깊게 갈라터진 가슴 근처에

몇 방울의 눈물들이 다시 고여드는 것을 본다

 

 


 

금기웅 시인

충북 옥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자신없는 것들은 걸려 있다> <끝없는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