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홍 시인 / 낡은 서랍 속 편지 4
큰나무 쓰러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슬픔이라기 보다는 우격다짐이었다.단단한 둥치 번쩍 치켜들어 자빠뜨릴 만한 완력으로 밑둥 어디 틈을 내주고 튿어 지는 소리, 이윽고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몸 속, 질서의 결 세우던 뼈들이 일제히 해체되는 소리, 뿌리를 붙들던 흙무덤 크게 요동치며 들썩이는 순간과 함께 켜켜이 새겨진 역사가 온전한 무게가 되어 한 쪽으로 기우는 동안 시퍼렇게 뜬 눈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소리를 나는 붙잡을 수 없고 증언할 수 없다.그 무참한 절명을 흐름이라고 도무지 어떻게 말할 수 없다.일생 키운 그늘을 증명할 수 없는 순간 앞에서,단 한 순간 지르는 그 짐승도 질러 본 적 없는 소리를, 내 허리를 찍고 있는 연장 자루 하나 짓무른 살들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음을 한 번 물린 칼날은 흐르지 않음을.
김기홍 시인 / 단단하게 접힌 우산 하나
1 비가 내린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 그날 바람의 옷자락처럼 비가 토막소리를 내면서 창턱을 넘어 온다 뒤늦게 엉킨 먼지가 몇 개의 상자처럼 비에 젖을뿐 가벼운 빗방울 소리 들리고 있다 들이치기라도 할 것처럼 헛수고처럼 내리고 있다 安心하라고 無事하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생색을 낸다 하지만 빗소리 점점 들리지 않는다 集中하지 못하는 音樂처럼 부서지고 뒹구는 소리 귓속으로 어지러이 드나들고 들리지 않는다
2 그 해 겨울 山寺에 내리는 비는 모른다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 궁금할 것도 없다고 했다 반가울 것도 더욱 없다고 했다 아무런 그리움 같은 거 떠오르는 후회 같은 거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놓은 罪같은 거 날개젖은 새처럼 울고 있는 시간처럼 처마밑에 웅크리고 있지만 모른다고 했다 감당할 수 없는 비는 모른다고 했다 겨울비는 더 젖을 기억이 없다고 차갑게 차갑게 내리고 있었다
3 門을 잠그는 일은 늘 입는 옷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머니 속을 드나드는 힘없는 손처럼 재봉선을 따라 지퍼를 올린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비가 내리고 슬플 것도 없는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눈동자 하나 비에 젖은 잘생긴 입술 하나 비에 젖은 비 하나 헝클어진 째즈처럼 어울려 다시 떠오르지 않을 짐짝처럼 가라않는다 숨소리도 나지 않는 아득한 유리관 속으로 비는 내린다
나 이제 놀라지 않네 한 번이면 되었지 나 이제 들키고 싶지 않네 더이상 소리 내지도 젖지도 않네 비오는 날 네 어깨를 빌리지도 않네 다시는 이해하지도 않네 다시는 편견의 처마 끄트머리에서 발목을 적시지 않네 다시는 낮은 울음소리로 담밑을 서성이지 않으네
4 멀리 비가 내린다 멀리 작고 정다운 불빛들이 보이고 사이 사이 비가 내린다 못생기고 질긴 우산을 받쳐든 방에도 지울 수 없는 비가 내린다 젖지도 않는 비는 그저 내린다 애써 침착하게 타일러 보지만 나는 잘못 살았다 물기 없는 식물처럼 닫힌 門 열어보면 가시같은 비가 내린다
김기홍 시인 / 가난한 식물
나는 마치 웃자란 식물 같아요 빈들판에 버려진 바람처럼 자꾸 어지러워요 여름엔 내내 가시만 빛나는 선인장처럼 아팠어요 단 한 번 꽃 핀 기억으로는 뿌리내리기 힘들어 살과 뼈들이 땅 속으로 녹아들곤 했어요 내 잘못이 아닌데 누이는 한 여름의 가지 끝에서 힘없이 툭 떨어져서도 웃고 있었어요 떨어진 채 마저 익으려는 果肉처럼 같이가요 어머니 한 번 뒤돌아 봐주세요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몸이 시멘트처럼 달라붙어요 이대로 두고 가지마세요 이상해요 그림자가 먼저 일어나려고 해요 생각해보니 그림자에 걸려 넘어졌나봐요 이제 나의 늘어난 고무줄을 좀 잘라주세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경주 시인 / 나는 지금 태양을 채집한다 외 1편 (0) | 2022.02.10 |
|---|---|
| 금기웅 시인 / 반성 외 3편 (0) | 2022.02.10 |
| 권현형 시인 / 어떤 콤플렉스 외 1편 (0) | 2022.02.10 |
| 고정국 시인 / 엉겅퀴 외 4편 (0) | 2022.02.10 |
| 강형철 시인 / 환생 외 3편 (0) | 2022.02.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