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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형철 시인 / 환생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0.

강형철 시인 / 환생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오락가락하는 老母(노모)

옛 기억이 되살아나시는지 밥 안치는 일을 자청하신다

손목 아래로 빚어지는 정겨운 리듬

썩썩 써스럭, 써-억 써억 썩

바가지가 요란해진다

쏟아지는 수돗물이 시원타며 손등이 웃고

어둑한 집 안의 오후가 환해진다

 

어머니 일흔아홉이니

쌀 씻어 밥 안치는 일은 칠십 년은 됐으리라

짚풀은 부지깽이로 아궁이에 넣어 지피고

한참 후엔 전기밥통에 쌀 씻어 안쳤으리라

 

식구들의 사발에 깨끼밥도 푸고

때로 고봉밥 꾹꾹 눌러 펐으리라

떨어지는 밥알은 손으로 주워드시면서

 

"엄니, 다시 시집가도 되겠네, 쌀 씻는 소리 들응게"

"야 좀 봐라, 못 허는 소리가 없네, 떼-엑!"

 

제14회 고산문학상 수상 작

 

 


 

 

강형철 시인 / 수면제

 

 

어떤 이는 나에게 효자라 말하고

어떻게 삼 년 동안 혼자 어머니를 모시냐고 궁금해하지만

나는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웃는다

 

여동생도 삼 년이나 모셨고

나는 이제 조금 모시고 살뿐이며

실은 내가 모시는 게 아니고

어머니에게 개인지도 받는다는 것

순간순간 온몸으로 깨우쳐주시는 가르침 받고 있는 것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우렁각시보다 더 요긴한

기막힌 처방전 하나 지니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육 년쯤 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기발한 행동은 줄였지만

이따금 한마디씩 깨우쳐주시는 재미가 있고

어머니의 놀라운 상상력에 내 션찮은 상상력은 늘 어리둥절한다

 

부축하며 걸어도 주간보호센터 선생님들이 있고

학교에서 돌아오실 시간엔

하이코 우리 어머니 오셨네 큰소리로 모시면 된다

 

저녁밥을 천천히 대화하며 나누어 먹고

일회용 팬티 바꾸어드린 뒤

치카치카 양치를 하면 하루가 끝나는 것

 

한발 한발 서서히 침대에 안내하고

아직 정신이 있는 어머니께 비장의 수면제를 드린다

 

오늘 하루도 잘 보냈네요 어머니 학교 갔다 오시고 밥도 먹고 야쿠르트로 입가심도 했고 약도 먹었네요 양치도 하고 팬티도 갈아입었으니 오늘은 다 끝났네요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제 편안히 주무세요 저는 제방으로 가서 이제 공부 좀 하려고요 어머니 정말 사랑해요

 

평생 장남 일에 안 된다는 말 한 번 안 하신 어머니

내가 교회고 절이라고 하셨던 어머니

공부해야 한다는 말엔 그 어떤 것도 방해가 돼선 안 된다고 믿는 어머니

 

'공부해야 돼요'라는 말은

그래서 가끔 힘들면 사용하는

우리 어머니 최고의 수면제

 

 


 

 

강형철 시인 / 봄날, 남산

 

 

  절개지를 받친 철조망의 손이 위태롭다

  하얗게 혹은 뭉툭하게 베어져 나간 암석들이

  그리운 봄날이어서가 아니고

  떡갈나무 굴참나무 피부 물러지는 소리가

  눈녹이물 실려 몸살로 흔들리고

  노란 개나리 맞으러 물관부를 들락거리는

  지심의 기운이 암석들을 못 견디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암석쯤이야 어깨로 밀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남산보다 더 큰 산이라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

  어디선가 무엇인가 다가오는 소리

  옛 안기부 건물 앞으로

  팔각정 쪽으로

  국립극장 쪽으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무엇인가

  오는 소리

 

 


 

 

강형철 시인 / 사랑을 위한 각서12

 

 

나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말했던가

칸나꽃 붉게 폈던 여름이었나

그대 왼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칼 올려

땀을 닦던 유리창 곁이었나

 

나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말했던가

세월은 흘러 너와 나의 얼굴엔

시간이 숨쉬고 간 그늘만 아득하고

그때 서로에게 기댄 이야기가 가늘고 긴

주름으로 기울었는데

 

나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말했던가

우부룩한 잡풀더미 속

칸나꽃 붉게 피어 우르르 밀려와

저기서 문득 멎었는데

 

 


 

강형철 시인

1955년 전북 군산 출생. 숭실대 철학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해망동 일기>(89년) < 야트막한 사랑>(93년)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2013). 평론집 <시인의 길 사람의 길>(94년), < 발효의 시학>(97년). 숭의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