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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국 시인 / 엉겅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0.

고정국 시인 / 엉겅퀴

 

 

쉽사리 야생의 꽃은

무릎 꿇지 않는다.

 

빗물만 마시며 키운

그대 깡마른 반골(反骨)의 뼈

 

식민지 풀죽은 토양에

혼자 죽창을 깎고 있다.

 

 


 

 

고정국 시인 / 민들레 행복론

 

 

뜰 듯 가라앉고 앉을 듯 다시 뜨는

새끼 새 행보에서 날개 터는 법을 배워

벼랑 끝 민들레 송이가 꽃씨들을 깨울 때

 

까만색 자궁 하나를 낙하산에 묶어놓고

바람아 날 데려가, 바람아 날 데려가!

아득한 착지점까지 바람에게 맡기며

 

"왜 살아?" 묻는다면 피식하고 웃고 마는

"죽지 못해 사노라"는 그 말 꾹꾹 삼키면서

길가에 민들레꽃이 바람에게 전한다

 

사람이 말을 참아, 사람이 욕심을 참아

정녕 그로 하여 사람이 웃는다면

길섶에 민들레 불러 그 웃음을 배운다면

 

빗물만 마시고도 원망 한 번 않고 사는

낮은데 살면서도 웃음 한 번 잃지 않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를 둘러 오리니

 

하여 '들레'네 식구 그 행복을 배우리라

빗물 반 그늘 반 멸시 반 배고픔 반

붕 하고 하늘로 뜨는 그 씨앗을 보리니

 

 


 

 

고정국 시인 / 탈옥을 꿈꾸며

 

 

스스로 갇혀 사는 창살보다 더한 감옥

더 먼 곳 더 깊은 곳 그 감옥에 갇히기 위해

오늘도 갇혀 삽니다, 시조 삼장 육구의

 

강낭콩 콩깍지에 강낭콩이 숨어서 크듯

삼장 육구 열두 음보에 숨어있는 하늘의 마음

그곳을 찾아 삽니다, 그 사슬에 묶여서

 

자신에게 묻습니다, 네 장점이 무어냐고

또 내게 묻습니다, 네 단점이 몇이냐고

묶다가 풀다가 하며 내 포승을 놓습니다

 

좋은 책 좋은 스승은 가둬두지 않습니다

좋은 법 좋은 길은 가둬두지 않습니다

차라리 제 몸을 풀어 길을 더욱 밝힙니다

 

그래서 나의 포승은 내 안에 꽉 차 있습니다

열 번 묶고도 남을 그 포승에 다시 묶여

오늘도 아픈 몸 이끌고 시를 찾아 나섭니다

 

시는 나의 감옥이며 해방구라 말합니다

시는 나의 반쪽이며 목적이라 말합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포승 그 포승이 좋습니다

 

오월도 막바지에 여름처럼 덥습니다

더운 길 한참을 걸어 연금 받고 왔습니다

이 달도 구만 육천 원 기초 삶을 산답니다

 

메추리 알 대여섯 개 플라이를 해두신 하늘

저녁 산책길에 개망초꽃을 보았습니다

때맞춰 새하얀 얼굴 보름달이 오릅니다

 

풋고추 메추리알 그 작은 걸 왜 먹나요?

먹을 거 넘쳐나는 대한민국 이 땅에서

작은 거 금기시 하는 그도 감옥이랍니다

 

생명을 중시하며 생명을 먹습니다

먹어서 내 몸속에 그 생명을 가꾼다는

희한한 나의 논리에 들꽃들이 웃습니다

 

웃다가 꽃을 보면 저도 내가 되겠다며

차라리 나를 먹어 제가 시인이 되겠다며

오늘도 카메라 속에 잠복하고 있습니다

 

 


 

 

고정국 시인 / 문어를 삶으면

 

 

요즘 문어들은

백 개 넘는 발이 있어

 

빵가게 구멍가게

이쑤시개 수입까지

 

그래서 문어를 삶으면

다리부터

자른다

 

 


 

 

고정국 시인 / 삽을 씻으며

 

 

나보다 삽을 먼저 씻는다.

시린 물 속에 삽날과 손을 담그고

한 해 저물도록 피와 땀을 쏟았던

흙 묻은 살갗들을 어루만진다.

삽질한 만큼 거둔다는 약속이야 그렇지만

저기압의 일기예보 따마다

뼈와 근육이 따로 뒤척이는 이부자리에

밤새도록 파고드는

물파스 냄새를 너는 안다 너는 안다.

무 농사 배추 농사 때로는

자식 농사의 밭떼기 거래가 끝나고

진눈깨비 농로길로 돌아온 밥상머리에

아들이 흘린 밥알을 주워먹는

아홉 개 반

지문 없는 내 손가락의 내력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세모 때면 들판으로 눈이 내리고

추곡수매를 거절당한 노적가리마다 시름이 쌓이면

협동조합에서 지급받은 새 영농수첩에다

서울 간 혈육의 산번지 주소를 옮겨 적는다.

그러나 삽이여

녹슬기보다는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칼날보다도 휘장보다도

더 숭고한 너의 번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안다.

새해에도 거듭 새해에도

너와 내가 일궈야 할 이 땅 어드메

가슴처럼 뜨거운 영토가 기다리고 있음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녹슬기보다 차라리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고정국 시인

1947년 제주도 서귀포 위미리에서 출생.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는 {민들례 행복론} 외 6권이 있으며, 위미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래기} 그리고 산문집 {고개숙인 날들의 기록}과 체험적 창작론인 {助詞에게 길을 묻다}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유심작품상', '이호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국동서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 지회장을 거쳐서,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덟 번째 시집인 {탈옥을 꿈꾸며}. 제18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