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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주 시인 / 나는 지금 태양을 채집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0.

김경주 시인 / 나는 지금 태양을 채집한다

 

 

1

허공사이로 둥근 피안이 놓여지고

돋보기 알에선 오래 전 묻어있던

햇살 냄새가 난다 돋보기는 주술이다

물 속처럼 고요한 세계 속에서 햇살은

넘칠 듯 넘칠 듯 출렁거린다

어느 행성으로 가던 빛을 나는

지금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한 생을 건너 온 맑은 시간들

종이 위로 차르르 쏟아진다

가만히 보면 행성의 마른 돌가루 같기도 한

이승의 찬 공기가 그 뜨거운 시간들에 닿아

치지직 탄다

 

2  

생은 아련한 굴절이다

서랍 속이 복잡하던 유년, 채집망엔

수많은 시간들을 날아 온 곤충들이

날개에 붙은 보송보송한 햇살들을 털곤 했다

적금을 소매치기 당하고 낮술에 취해

돌아온 어머니의 속옷을 살 속에 넣어주는

아버지의 눈빛은 느티나무보다 젊었다

고통은 몇 개의 꽁트 같았다

나는 그 밤 우는 어머니에게 가장

웃기게 생긴 곤충 한 마리 보여주었던가

아침이면 차갑게 식은 곤충의 몸에서

부스스 떨어져 나오던 햇볕들, 그 해 겨울

우리도 지상의 계절 위에서 잠시 떨던

몇 마리 뜨거운 시간이었을까

통장에 남은 이파리들을 세어 보고

새벽 대중 목욕탕 바닥에 나란히 누워

어머니와 나는 뽀얀 수증기 한 방울씩

이마로 뚝뚝 맞으며 오래 말.없.었.다.

 

3

고개를 들면 공터의 생수 같은 꽃잎들

소실점 잃고 흔들거린다 멀리

송전탑이 나르는 싱싱한 전기들이

순하게 엎드린 마을의 창문마다

불씨 한 장씩 부치고 있다

어머니 치약처럼 방안에 풀어져

타는 노을을 보고 있겠다

 

 


 

 

김경주 시인 /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

- 베리에게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 주었다 귀머거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이 목에 달렸다 라미가 늘의 생존을 물었고 분홍귀가 욜을 불러냈다 아슬이 나무의 우유 방울을 약속했고 동화는 저녁에 읽지 않기로 는의 손목을 잘랐다 라미는 투명을 흔들던 기괴한 한(寒)이 되었고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 살고 있는 저녁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늦은 그늘이 들어가는 자리다 그 저녁으로 들어온 그늘에 빗물이 묻으면 나무는 밤보다 어두워진다 어떤 짐승도 구멍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며 어떤 아이도 구멍 안으로 낮게 엎드려 울지 못한다 어둠은 저녁이 천천히 빚어내는 꿈이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서 저녁의 거미가 나온다

 

 목젖에 붉은 연못이 얼어붙은 가을이 있었다 인간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저녁에 목젖은 겨우 활동 한다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빨강에서 새들은 노래의 추종자로 예측되었고 물 묻은 모든 계단에서 나는 일부는 구부정하고 일부는 슬프고

 

 민첩한 그러나 투명한 거미줄로만 모아진 파란 눈덩이를 뭉쳤다 오늘 내 지구의 진술을 기억하라고 인중이 짙은 초식동물이 생각하는 꽃잎의 무게가 되었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서 목젖이 생긴다

 

 겨울에 한 줄로 내려온 거미의 그림자를 밟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아는 가장 고독한 문, 희귀하지만 색이 선명한 거미일수록 허기가 길다 허공의 계안에서 유일하게 풀색의 목젖으로 버티는 거미의 혈통은 인간이 완전히 사라진 수준의 음악을 닮았다 깃털을 달고 있는 산딸기처럼 그대는 결국 한밤중에 발견할 내 눈동자 안에서 사멸할 정적, 그대가 그 기타로 심해어처럼 인간을 뒤척이며 서러운 목구멍을 빚어갈 때 나는 아무도 모르는 목젖을 가졌다 내가 지나간 적이 있는 목젖으로 그대는 노래를 부른다.

 

 


 

김경주 시인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와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 『고래와 수증기』『시차의 눈을 달랜다』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당신도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 『노빈손의 판타스틱 우주 원정대』등이 있음. 2009년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