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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규관 시인 / 발을 씻으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0.

황규관 시인 / 발을 씻으며

 

 

 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언제부턴가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는 발을 씻으며

 엄지발톱에 낀 양말의 보풀까지 떼어내며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종달새 울음 같은 사랑을 위해

 언젠가는 가슴에서 들끓는 대지를

 험한 세상에 부려놓으려 길이,

 되었다가 미처 그것을 놓지 못한 발

 그러니까 씻겨내려가는 건 먼지나 땀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는 건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신 지워주는 의례여서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길을 지우지 못해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는데

 오늘도 오래 걸었으니 발을 씻자

 흐르는 물에 길을, 씻자

 

 


 

 

황규관 시인 / 위대한 유산

 

 

아홉 살 때 만난 의부의 집은 홀로 초가집이었다

밤이면 흐릿한 호롱불이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꼰 새끼줄이었고

멍석이었고, 바작이었고, 삼태기였다

정지 앞에는 암소 한 마리가 더운

숨을 푸푸 쉬고 있었다

재를 덮어 괭이로 쓸어낸 칙간이었고

산기슭에 매달려 있는 옥수수밭이었다

마당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또랑물이었고

달빛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가난과 전쟁의 상처가 남긴 폭력이었고

어머니가 밭에서 김매다 돌아와 낳은

동생의 울음이었다

생활보호대상자라 잠깐 눈치 보며 얻어먹은

빵과 우유였고, 까만 콜타르를 뒤집어쓴

국민학교 교사였고 외우지 못해

놀림감이 된 구구단이었다

평생, 아니 죽어서까지 화해를

거부했던 그 시간들은

그가 본의 아니게 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영악한 내가 그에게서 빼앗은

숨소리 거친 목숨이었다

 

 


 

 

황규관 시인 / 화장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은 이제

재앙뿐인가 늦눈이 그치고

수줍은 바람이 불자

냇물이 조금 맑아졌다

지금껏 목소리가 너무 컸다

나는 좀 더 작아져야지

그리고 골짜기처럼 어두워져야지

대출을 받아서라도 검은 밭뙈기를

어머니께 사 드려야 했는데

거리에는 적막이 반, 그래도

파도처럼 자동차 소음은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은 꿈꾸는 고독인데

잘려진 나무의 비명에게서

엄마의 피를 채 씻지 않은 아이의 주먹이

시작될 수 있을까

이제 비극 앞에서 배회하지 않기로 했다

바깥으로 자라던 말을 꺾어

아궁이에 던져 넣기로 했다

윗목에서는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이

밤새 두런거리고

무화과나무는

꿈속에서 점점 익어갈 것이다

 

-시 전문 계간 《딩아돌하》 2021년 봄호

 

 


 

 

황규관 시인 / 좁쌀만 한

 

 

좁쌀만 한,

좁쌀만 한 것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좁쌀 한 알에 우주도 있고

폭풍우도 있으니 좁쌀만 한,

전진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좁쌀만 한 자유, 좁쌀만 한 평화, 좁쌀만 한

민주주의, 좁쌀만 한 웃음, 좁쌀만 한 좁쌀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은

밥에 좁쌀을 넣지 않는다.

물로 씻을 때마다 체를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정부를 믿으면 된다고 한다

좁쌀만 한 믿음만 있으면

사랑은 봉우리만 밟고 걷는 거인처럼

우리에게 올 거라고 한다

좁쌀만 한, 좁쌀만 한 것만 있으면

모든 게 순조롭고, 무사하고, 태평하고

결국 나태하고, 퇴보하고, 추락하고

아… 끔찍한 역사를 되풀이하자고 한다

좁쌀만 한 치부를 하는 동안 강물이 썩고

산이 두 동강 나고 어린아이가 죽고

휠체어는 내던져졌다

여성의 구두가 벗겨졌다 공장 굴뚝에

연기 대신 사람이 펄럭였다

그놈의 좁쌀만 한 비겁 때문에

그놈의 좁쌀만 한 일상 때문에

그놈의 좁쌀만 한 안위 때문에

그놈의 좁쌀만 한,

좁쌀만 한,

좁쌀 같은,

아니 좁쌀만도 못한…

(좁쌀에는 고혈압을 예방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

 

 


 

 

황규관 시인 / 병산서원 배롱나무

 

 

키 큰 배롱나무에는 꽃 한 송이 없어

해가 일찍 졌다

맨몸으로 세상을 산다는 건

엎드려 제 안을 보며 산다는 뜻일까

강기슭 언 살얼음 위로

마른 바람이 불고

머뭇거리면 어둠 속에 가둬버리겠다는 듯

산그림자가 길어졌다

맨발로 만대루 올라서

生의 냉기에 화들짝 놀란 뒤 길 떠났을 때

입교당 뒤편 배롱나무가 어스름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누구든 빛나는 풍경을 가슴에 담아두고 싶겠지만

저 배롱나무처럼 풍경이 되어 사는 일이

스스로 빛을 뿜는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내 생전에, 아마 한 生을 다 지불해도

입교당 뒤편 키 큰 배롱나무가 될 수 없겠지만

나는 마냥 가슴이 저리고

한번은, 단 한순간만은 세상도 버리고 싶어졌다

 

시집 - 물은 제 길을 간다

 


 

황규관 시인

1968년 전주 출생. 시인, 출판인. <삶이 보이는 창>의 대표. 1993년 「지리산에서」 외 9편으로 전태일 문학상 당선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