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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광일 시인 / 부재(不在)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1.

서광일 시인 / 부재(不在)

 

 

당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힘껏 벗어던질까 봐

땀 냄새 나는 양말을 뒤집어 아무렇게나 걸쳐 놓을까 봐

냉장고 문을 열어 둔 채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마실까 봐

저녁 먹자마자 휙 게임하느라 마우스를 똑딱거릴까 봐

컴퓨터 자판 사이까지 닦아 내는 깨끗이 빤 손걸레처럼

목덜미만 봐도 어찌나 닮았는지 올라가는 입꼬리처럼

아들이 그리워서 아들의 옷을 입고 다니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릴까 봐 잊어버릴까 봐 매일매일 맴도는 오늘처럼

 

서광일,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 2017, pp.56~57

 

 


 

 

서광일 시인 / 마침

 

 

 지지리 궁상이다.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가 지들끼리 꽉 엉켰다. 마침 아기를 재우고 걸레를 빨던 삼양연립 201동 401호 은경 씨. 다음 달부터가 걱정이다. 임신 8개월까지 직장에 다녔고 벌써 그게 1년 6개월 전이다. 마침 남편 회사는 일이 점점 줄더니 감원이 시작됐다. 경기가 나빠지면 사람 수를 줄이는 방법 말고 이렇다 할 대안은 없는 건가. 결국 엉킨 빨래는 바닥에 떨어지고 엉겨 붙은 먼지처럼 질문만 잔뜩 묻어난다. 오늘따라 유난히 빨래들이 탁탁 털어지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프리미엄 따져 집을 구한 것도 아닌데 대출 이자는 대놓고 올랐다. 마침 아기가 생겼고 태어났고 자랄 것이다. 아기 옷은 따로 빨아야 되는데 엉킨 빨래 속에 곰돌이 내복 바지가 딸려 온다. 아기가 깼는지 우는 소리가 난다. 마침 비행기가 낮게 난다. 진짜 더럽게 시끄럽게도 난다.

 

서광일,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 2017, p.17.

 

 


 

 

서광일 시인 / 이런 식으로 서성이는 게 아니었다

 

 

  11월 저녁 버스 정류장 앞이었다

  겨울이 도착하는 소리를 다급하게 들었다

 

  사람들은 버스가 멈추는 지점을 향해 달렸고

  몇 개의 얼굴들이 확대되었다가 사라졌다

 

  부모와 자식은 간단명료하게 이별 연습을 하고

  남편과 아내는 무관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라지지 않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다

  어머니는 수술한 사실을 감추려고 전화기를 꺼 놓았다

 

  아버지는 원래 아픈데다 원체 말이 없다

  이 계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돈이다

 

  다가올 인생이 끊임없이 12월만 반복될 것 같아서

  두툼하고 견고한 외투를 입은 자들만 훔쳐보았다

 

  사람들은 어깨에 맨 근심을 붙잡고 버스에 올랐다

  어떤 추측도 인과관계도 분명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날 조심스레 지워 버린 게 분명했다

 

 


 

 

[2001년 중앙신인문학상]

서광일 시인 / 복숭아

 

 

비닐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딛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서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 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껏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서광일 시인

1973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 199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0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을 통해 등단. 현재 극단 <작은 신화>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