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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란 시인 / 화목(火木)
민박집 뒷방 툇마루 아래 가지런히 쟁여둔 장작을 바라본다 불을 품고 얌전히 누워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장작 사이 벌어진 틈새들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토해낸다 캄캄한 구멍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게 보인다 욕망의 마른 혓바닥들이 꿈틀거리며 한꺼번에 기어나올 것만 같다 손만 갖다대도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것이다, 제멋대로 몸뚱이를 굴릴 것이다, 마음 속에서 수없이 무너지는 연습을 하며 뼈속까지 타오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성냥개비 하나의 작은 불씨에도 우르르 몸을 내던질 것 같은 마음의 장작들, 멀리 서울을 떠나온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곧 진눈깨비가 쏟아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송정란 시인 / 허튼층쌓기
무위사 산길을 허적허적 걸어오르며 난 지금 막돌이나 이리저리 끼워 맞추며 내 인생의 허튼층이나 쌓아볼까 하는데요 속세에 팔아온 다리품이 허튼걸음만 옮기는
대리석 백팔 계단을 마음은 자꾸 곁눈질하며 삶이란 저렇듯 반듯하게 번뇌도 저렇듯 매끄럽게 제 고통을 다듬어야 하는 건가요 가슴에 박힌 돌들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송정란 시인 / 밤길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건 불길하다 두렵다
숱한 별들은 왜 말이 없는가
캄캄한 세상에 박혀 있는 저 희미한 얼굴들
고통의 내공이 쌓여 두텁게 진을 친 어둠
허방에 빠진다 해도 함부로 내딛고 싶다
우루루 떨어지는 별빛들 발부리에 채이도록
송정란 시인 / 나혜석傳
-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에미는, 지금 사막을, 횡단하는 중이다 마음의 바깥은 신기루처럼 아득하고 내 안은 눈뜰 수 없는 모래바람만 가득하다
제 영혼이 물이란 걸 모르는 낙타처럼 그렇게 터벅터벅 목마름으로 버텨내리라 끝없이 걸어야 할 길들이 모래무덤을 이루어도
황량한 세상에 한 줌 모래로 흩뿌려져도 낙타의 발자국처럼 흔적 없는 여정이어도 아이야, 뼈 아픈 후회없이, 生의 사막을 걸어가리
송정란 시인 / 선운사 배롱나무 하안거(夏安居)에 들다
올해도 저 허공에 던져둔 화두를 향해
굵직한 가부좌로 틀어앉은 목백일홍
점오행(漸悟行), 오랜 수행으로 굽은 가지, 삼매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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