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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찬옥 시인 / 아기의 입 속에 우주가 숨어있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2.

김찬옥 시인 / 아기의 입 속에 우주가 숨어있다

 

 

두 달 된 아기가 옹알이를 한다

 

아기는 오- 오 한자밖에 모르지만

그 말은 어떤 무성한 말보다 위력이 세다

 

입속에 세상 만물이 다 응집되어 있다

 

고 작은 입을 통해 우주가 열리면

창밖 벚나무도 꿈쩍 놀라 억겁의 눈을 뜬다

 

고목이 되어버린 벚나무 가지들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승천할 기세다

 

아기의 단조로운 모음 하나로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걸린 입들이

창밖에 핀 벚꽃보다 더 훤하다

 

 


 

 

김찬옥 시인 / 북두칠성

 

 

깊은 밤, 하늘 높은 곳에 자물통이 걸려있다

긴 바지랑대 하나 빼들고 자물통을 툭 건드려본다

 

굳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자

사춘기 소녀가 두드리는 풍금 소리가 들려오고

정수리에서 풀냄새, 쑥 냄새, 모깃불이 피어오른다

 

별밤 친구들과 둘러앉아 감자와 옥수수를 먹던 평상이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사립문 밖에서 불러대던 머슴아들의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고

 

내 맘에 꽃물을 들여 놓고 서울로 전학 가버린 아이,

동구 밖까지 달빛을 깔아 놓고 기다리던 두근거림이 떠오른다

 

떨리는 어깨를 내려놓자

바지랑대 끝이 노랗게 물이 들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큰곰자리별이 움푹움푹 패였다

 

 


 

 

김찬옥 시인 / 나팔

 

 

계집아이는 종종

뒤란 마루 끝에 앉아서

오줌을 쌌다

 

오줌줄기가

쏴-아 소리를 내며

화단까지 뻗어갔다

 

나팔꽃 한 줄기

울타리 끝까지 타고 올라가

나팔을 불어댔다

 

한낮의 햇빛이

오줌줄기 위로 쏴-아

쏟아져 내렸다

 

 


 

 

김찬옥 시인 / 수탉

 

 

저 놈의 수탉들!

닭장만 빠져나가면/꽃밭을 헤집는다

色이 머리끝까지 뻗쳤다

봉선화, 채송화, 다알리아……

눈에 띄는 것마다

음침한 부리로 쪼아댄다

부리에 묻은 꽃물이

다 지워지기도 전에

또 다른 꽃들을 흘깃거린다

백주대낮부터 눈동자가 풀려

숨을 헐떡거린다

어둠이 깔리면

色을 접고

어쩔 수 없이 닭장으로 기어든다

 

 


 

 

김찬옥 시인 / 빗방울 독경

 

 

목탁소리 울려 퍼지는 산사에 가을비 내린다

구절초꽃처럼 향기롭게 일어나라고 가을비 내린다

수렁에 주저앉은 집채만한 연잎들 일어나라고 가을비가 내린다

다알리아꽃처럼 탐스럽게 피어나라고 가을비가 내린다

쩍 벌어진 밤송이에 적막이 깃들라고 가을비 내린다

법당에 엎드려 울고 있는 한 여인을 위해 가을비 내린다

처마 끝에 매달린 목어들 지느러미에 가을비 내린다

그리움이 바닥난 빈 찻잔에 가을비가 내린다

돌부처 머리 위에 가을비가 내린다

 

*격월간 <정신과표현> 2010년 1/2월호 <신간 시서평>에서

 

 


 

김찬옥 시인

1958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 1996년 《현대시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가끔은 몸살을 앓고 싶다』, 『물의 지붕』, 『벚꽃 고양이』와 수필집 『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가 있음. 현재 <광명 사회체육센터유아스포츠단>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