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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제 시인 / 한 방울의 고통
실습용 애인이 떠나자 갑자기 약지손가락이 생인손을 앓는다 손끝에 모여든 한 방울의 통증으로 온몸이 들끓는다 날림으로 조립했던 애무의 손끝도 그런 증상이었다 애인은 작동될 때마다 덜커덩거렸다 내장을 더듬으면 빠져나온 나사못이나 깨진 파편의 감촉 손끝이 아려왔고 그때마다 몇 방울의 윤활유 같은 욕설을 배설했다 사용기한을 넘긴 애인은 폐기처분되었다 작동을 멈춘 감촉은 망가진 공구처럼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미세한 느낌들을 친절하게 전해주던 손끝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소스라치듯 물러서는 세상과의 접속이 끊어진다 모든 애무는 관념이 된다. 오랜 시간 너무 많은 감촉들이 스며들었다 차갑고 뜨거운, 거칠고 부드러운 세상의 느낌은 추억의 부속품처럼 제각각 내 생을 조립하려 몸속에 진열되었지만 스스로 분해하고 망가지는 느낌에 길들여질 뿐 오래 고여 곪아버린 일회용 애인들이 무감각한 몸을 빠져나가려 벌겋게 몰려든다 폐기된 부품들처럼 널려진, 수많은 감촉들이 뒤범벅되어 통증이 인다 나는 한 방울도 안 되는 고통을 감싸쥐고 온갖 생소한 느낌들에게 손가락을 들이민다.
배용제 시인 / 먼지의 이력서
책장 구석 수북한 먼지를 쓸어본다 먼지의 살결이 부드럽다 손바닥을 털면 형체도 느낌도 없이 사라질,
오래전 이것도 어떤 사물이었던가 수수억년 전에는 웅장한 바위였거나 여린 풀포기였거나, 혹은 거대한 공룡의 몸으로 포효를 했던가 잠깐씩 반짝이며 흩어지는 저 입자들 전생의 내 몸이었는지 모른다 몇 억 동안 넓은 공기 속을 날아 영혼의 새로운 집을 찾아오진 않았는지 무수한 원시의 기억들
환영 같은 빛으로 허공에서 아른거리지만 순식간에 펼쳐지는 기호를 나는 해독할 수 없다 아니 그 누구도 찰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어떤 존재들의 지나온 시간들도 이렇듯 툭, 털어내면 사라지는 반짝거림이다
다시 수억년이 지난 어느 날 먼지들은 또 다른 내가 되어 여기 서 있고 나는 먼지의 입자가 되어 그의 책장 구석에 쌓여 있을 수도 있겠다 아주 잠깐,
배용제 시인 / 홀로코스트
- 1999년 7월 어느 날, 씨랜드 수련원에서 수십 명의 아이들이 홀로코스트되었다. 그때 어둠은 고요했고 어디선가 술잔들이 건배를 하거나, 음악이 흐르거나, 수많은 정자들은 수정을 향해 몰려갔다
불꽃이, 불꽃 속의 신들이 아이들의 잠을 고스란히 먹어치운다 텅 빈 잠의 껍질 안으로 눈부신 어둠이, 활활 타오르는 어둠이 밀려온다 말랑말랑하고 얇은 껍질들이 달구어진다, 딱딱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불꽃은, 불꽃 속의 신들은 잘 구어진 잠부터 골라 먹는다 검은 트림이 공중으로 솟구친다 멀리서 창백한 달이 사이렌을 울린다 땅의 위의 모든 잠들이 소스라치며 깨어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비어버린 잠 주머니를 들고 눈 비비며 운다 부스러기 잠을 주워 담는다 애써도 달콤하고 순한 잠은 채워지지 않는다 다시 아이들을 눕히는 잠은 맵고 뜨겁다 딱딱한 잠의 껍질 안 아이들이 채워진다 불꽃의, 불꽃 속 신들의 한 끼 식사가 끝난 곳 검고 푸석푸석한 배설물이 가득하다 거기에서도 아이들은 잘 잔다
* 홀로코스트 : 산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
시집- 이 달콤한 감각/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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