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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 / 곰장어 굽는 저녁
수족관 속 곰장어는 슬퍼서 몸이 길구나 물속을 얼마나 후려치며 싸돌아다녔기에 이렇게 길쭉해졌다는 말이냐 일생(一生)이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그 길이 몇뼘 늘리는 일이었구나
그러나 생(生)을 벗기는 일 또한 가만히 보니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살이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듯 껍질은 단숨에 벗겨진다
평생 몸에 두르고 살던 껍질은 거추장스러웠으나 껍질 벗긴 다음에 드러난 알몸은 외려 부끄러운 것, 그리하여 퍼덕퍼덕 몸을 떨다가 곰장어는 자신을 선선히 도마 위에 눕혔을 것이다
간장과 고추장을 몸에 바르고 지금
곰장어는 숯불 위에 올린 석쇠에 누워 있다 더는 꼬리로 바다를 후려칠 필요가 없고 다시는 뜨거운 불 위를 헤엄쳐 갈 일 없는 몸이 발긋발긋 익어가고 있다
하늘로 기어오르려나 포장마차 밖에는 눈보라의 긴 꼬리가 세상 속에다 구멍을 내는 저녁
시집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년 창비)
안도현 시인 / 토란잎
빗방울, 토란잎의 저고리
이것저것 자꾸 큰 것도 작은 것도 달아보지만 혼자 다 갖지는 않는 참으로 단순하게 단순하게 사는 토란잎
빗소리만큼만 살고 빗소리만큼만 사랑하는 게다 사랑하기 때문에 끝내 차지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거다
귀고리. 없으면 그냥 산다는 토란잎
시집 ㅡ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년 창비)
안도현 시인 / 바람의 두께
씨근덕씨근덕 그렇게 몇날을 울던 제 울음소리를 잘게 썰어 햇볕에다 마구 버무리던 매미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때맞춰 배롱나무는 달고 있던 귀고리들을 모두 떼어냈습니다 울음도 꽃도 모두 처연한 무늬만 남았습니다
바람의 두께가 얇아 졌습니다
현대시 200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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