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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라일락 그늘 아래서
맑은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날 네 편지를 들면 서롭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줄
오세영 시인 /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처녀의 따뜻한 혀끝에서 녹는 아이스크림 그 완전한 소멸의 쾌락을 위하여 크림은 얼마나 자신을 굳혀야 했던가, 이념의 단단한 틀에 갇히고 서릿발 싸늘한 증오에 떨며 파아랗게 날 세운 눈빛, 그러나 침묵의 절정에선 모든 존재는 물체가 된다. 해방시켜다오, 나는 자유롭고 싶다. 한 처녀의 순결한 입맞춤으로 사르르 풀리는 육신의 속박.
오세영 시인 / 신념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밭, 무우 하나 땅에 묻힌 채 강그라지고 있다. 돌아보면 텅 빈 들판, 강추위는 몰아치는데 분노에 일그러져 시퍼렇게 하늘을 노려보는 그 눈,
뽑혀 생명을 보전하다가 일개 먹이로 전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대지의 중심에 내리고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구나.
승산 없는 전투가 끝난 전선, 지휘관을 따라 부대는 모두 투항해버렸는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비인 들녘에서 외롭게 총살 당한 푸른 제복의 병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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