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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시인 / 수박
삼천 원짜리 작은 수박덩이를 들고 땀을 닦기 전 거짓말처럼 몇 번 수박을 두드렸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대답도 거부하는 수박의 울림, 속을 보지 않는 말, 말을 드러내지 않는 빛깔, 자르면 붉은 잇몸 같은 속이 검은 來生의 씨앗들 어서 가져가라, 어서 가져가라, 촘촘히 박혀 있을 게다. 자랄 수 없는 바닥에 퉤 퉤 뱉어지는, 숨막히게 더운 여름 날, 까만 수박 씨앗들 검은 파리떼만도 못하리라, 한 끝 유쾌한 단맛이 끝난 뒤에 저렇듯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生을 수박씨들은 감추고, 먼 곳에서 우레가 돋는 먹장구름의 뒤꼍에서 나는 물찌똥을 누고 푸른 죄의 싹을 틔우러 예까지 흘러왔다 지루한 낮꿈의 장마를 건너리라 아내의 배가 자꾸 불러온다. 老産의 배에 검푸른 줄을 긋듯 내 은밀한 손길이 뱀처럼 쓰다듬는 한낮, 아내는 거꾸로 들어선 아이 걱정에 시퍼런 메스같은 부엌칼을 자꾸 내게 내미는지 모른다 수박은 몇 개월 째에서 배를 가르려고 이승에 나온 것일까
시집 <아껴 먹는 슬픔> 문학과 지성사
유종인 시인 / 사마귀와 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당엔 당신이 붙들고 섰던 오랜 목련나무마저 잘렸다 햇빛이 푸짐해졌던 걸까 잘린 둥치 근처에 이듬해 비비추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여름 허공에 꽃대를 밀어올리는 비비추 여린 속잎에 가만히 사마귀 새끼가 기어오른다 악수를 건네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나는 놈에게 벌써 秋波를 던지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고 숨을 죽이자 눈길은 이내 그윽해졌다 누구나 제 어미를 잡아먹고 크지 않은 새끼가 어딨겠는가 肉食의 탁월한 몸짓은 오늘도 내일도 그 너머 기일게 구불거리는 시간의 창자를 지구 몇 바퀴라도 감고 있으니, 내 어미 내가 잡아먹었고 그 어미 힘겨워 손 짚던 키 큰 목련나무 그늘이 오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애써 그 자리로 쏟아지는 햇살의 등골을 이고 나는 어린 사마귀와 수작을 부리며 마음을 어루나니 내 몫의 먹성도 누굴 또 먹여 살리는 自害의 아름다움! 그 그늘에 향기를 파는 꽃대를 부여잡고 사마귀 벌써부터 앞다리를 펼쳐 당랑권螳螂拳의 풀빛 사냥을 내게 드리우나니, 배고픈 놈들은 배고픈 놈들과 함께 제 어미를 불렀으나 그 어미 제 영혼의 뱃속에 들어찬 뼈와 살로 힘차게 죽어져 되살아나고 있으니, 사마귀야 대체 어미란 어미들은 이 땅에 잡아먹히려 울다 웃다 가는 눈물겨운 等身들이 아니었더냐, 갸웃 외고개를 틀며 어떤 향기로 죽음을 부를까 즐거이 고민하는 너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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