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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반칠환 시인 / 한 걸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6.

반칠환 시인 / 한 걸음

-속도에 대한 명상 11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반칠환 시인 / 장미와 찔레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칠환 시인 /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지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마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현대시학> 2003 . 12

 

 


 

반칠환 시인

196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89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전쟁광 보호구역』과 시선집 『누나야』, 시평집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뉘도 모를 한때』, 『꽃술 지렛대』, 장편동화 『하늘궁전의 비밀』, 『지킴이는 뭘 지키지?』 인터뷰집 『책, 세상을 훔치다』 등이 있음. 1999년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 2002년 서라벌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