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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칠환 시인 / 한 걸음 -속도에 대한 명상 11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반칠환 시인 / 장미와 찔레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칠환 시인 /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지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마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현대시학> 2003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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