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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달자 시인 / 개가론(改嫁論)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6.

신달자 시인 / 개가론(改嫁論)

 

 

앞으로 살 날이 멀었다면서

나보고 팔자를 고쳐 보라고 하네

내가 알기로 우리말은

망가진 것을 새로 손보는 것을

고친다라고 하지 않는가

내 인생이 그렇게 망가진 것일까

망가진 인생을 고쳐보면 이음새 없이

고쳐지기는 하는 것일까

바늘자국도 못자국도 없이

고쳐지기는 하는 것일까

앞으로 살 날이 멀었다면

그래 그렇지 한번 팔자를 고쳐보는 일

나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행복의 얼굴을 몰라서

아무거나 행복인 줄 안아버리면 어쩌나

안겨버리고 나서

운명이라고 다시 참고 주저 앉아버리면 어쩌나

달콤한 맛에 내 혀는 우둔해서

행복을 먹여도 맛을 모르면 어쩌나

너는 너무 억울하니 팔자를 고쳐보라는

그 목소리 앞에서

나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어물어물

절절 쩔쩔 얼굴만 붉히고 있네.

마음으로는 네 네 네 감읍하면서도

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나

까짓 거 한번 고쳐 봐도 될 일인데

한바탕 뜨거워져 불이 나도 될 일인데.

 

 


 

 

신달자 시인 / 산 도적을 찾아서

 

 

 

시름시름 앓는 나를 보고

문정희 시인이

신선생의 약은 딱 하나

산 도적 같은 놈이

확 덮쳐 안아 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 그것도 좋지

나는 산 도적을 찾아

내일은 광화문을 압구정동을

눈웃음치며 어슬렁거려 봐야지

그러나 문시인

높은 빌딩의 엘리베이터나

지하실에서 만나는

기린 목의 얼굴 하얀 사내들 속에

산 도적이 남아 있나 몰라

집 단속은 꼼꼼히 챙기고

밖에서는 아무도 몰래

어쩌구 저쩌구 하고 싶은

속 다르고 겉 다른 남자들 속에

그래도 어딘가 산도적이 숨어 있을까

새 천년의 밀림 속에

밤새 우려 낸 것은

숨은 눈물의 진한 다짐인가

눈부신 하얀 피로

오래 식지 않고 조용히 끓는

설렁탕 한 그릇

 

 


 

신달자(愼達子) 시인

194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봉헌문자』, 『겨울축제』, 『모순의 방』, 『시간과의 동행』, 『아버지의 빛』, 『아가』, 『아버지의 빛』 등과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외에 산문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등이 있음. 1964년 여상 신인여류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1998년 '향문화대상, 2001년 시와 시학상, 2004년 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