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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시인 / 텃밭에서 누군가,
누군가 아침부터 텃밭에 들어가 너른 잎에 빛이 담긴 자루를 탈탈, 털고 있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열매들의 비린 목젖에 단물을 떠 먹이네 덩굴 뒤에 숨은 애호박의 꽁무니로, 쑤욱 쑥 갓 구운 햇살을 밀어 넣으며 미로 같은 지문(指紋)을 낱낱이 호박잎에 새기고 있네
시평 2003년 겨울호
마경덕 시인 / 문
문을 밀고 성큼 바다가 들어섭니다
바다에게 붙잡혀 문에 묶였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고 사라지고
고요히 쪽문에 묶여 생각합니다
아득한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그대가,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 왔는지
마경덕 시인 / 더미 가족
차에 태우고 안전밸트를 매어 주네. 낯익은 사내 웃으면서 손수 시동을 걸어주네. 참 친절도 해라. 죽음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니! 순간 끔찍한 공포를 잊고 말았네. 다녀올게요. 무사히 잘 다녀올게요. 가벼운 나들이처럼 손을 흔들며 마주 웃어 주었네. 옆자리엔 임신 중인 아내와 뒷좌석엔 어린 아들놈이 타고 있었네. 문을 닫으며 사내가 또 웃었네. 무사 할거야. 별 일 아니야. 그 인자한 눈이 그렇게 말했네. 나는 널 낳은 아비야. 너에게 팔과 다리를 준 아비야. 자그마치 네 몸값이 얼만지 아니? 그래요. 억대가 넘는 몸값을 알아요. 복제인간을 만드신 위대한 아버지. 내 가족의 갈비뼈는 아버지의 것과 비슷해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동차 한 대를 위해 일가족을 거느린 아버지. 이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요. 도무지 방어防禦를 모르는 제 이름은 더미*거든요. 아, 아버지 아무 걱정 마세요......이제 악셀을 밟고 벽을 향해 달려가면 되나요?
*더미(dummy): 센서가 달린 실험용 인형, 각종 자동차 충돌시험에서 운전자 대신 가상의 사고를 당한 뒤 예상 상해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함. 자동차 한 대를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더미가 쓰러진다고 함.
2003년 문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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