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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경덕 시인 / 텃밭에서 누군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6.

마경덕 시인 / 텃밭에서 누군가,

 

 

 누군가

 아침부터 텃밭에 들어가

 너른 잎에 빛이 담긴 자루를

 탈탈, 털고 있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열매들의 비린 목젖에

 단물을 떠 먹이네

 덩굴 뒤에 숨은 애호박의

 꽁무니로, 쑤욱 쑥

 갓 구운 햇살을 밀어 넣으며

 미로 같은 지문(指紋)을

 낱낱이 호박잎에 새기고 있네

  

시평 2003년 겨울호

 

 


 

 

마경덕 시인 / 문

 

 

문을 밀고 성큼

바다가 들어섭니다

 

바다에게 붙잡혀

문에 묶였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고 사라지고

 

고요히 쪽문에 묶여

생각합니다

 

아득한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그대가,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 왔는지

 

 


 

 

마경덕 시인 / 더미 가족

 

 

 차에 태우고 안전밸트를 매어 주네. 낯익은 사내 웃으면서 손수 시동을 걸어주네. 참 친절도 해라. 죽음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니! 순간 끔찍한 공포를 잊고 말았네. 다녀올게요. 무사히 잘 다녀올게요. 가벼운 나들이처럼 손을 흔들며 마주 웃어 주었네. 옆자리엔 임신 중인 아내와 뒷좌석엔 어린 아들놈이 타고 있었네. 문을 닫으며 사내가 또 웃었네. 무사 할거야. 별 일 아니야. 그 인자한 눈이 그렇게 말했네. 나는 널 낳은 아비야. 너에게 팔과 다리를 준 아비야. 자그마치 네 몸값이 얼만지 아니? 그래요. 억대가 넘는 몸값을 알아요. 복제인간을 만드신 위대한 아버지. 내 가족의 갈비뼈는 아버지의 것과 비슷해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동차 한 대를 위해 일가족을 거느린 아버지. 이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요. 도무지 방어防禦를 모르는 제 이름은 더미*거든요. 아, 아버지 아무 걱정 마세요......이제 악셀을 밟고 벽을 향해 달려가면 되나요?

 

*더미(dummy): 센서가 달린 실험용 인형, 각종 자동차 충돌시험에서 운전자 대신 가상의 사고를 당한 뒤 예상 상해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함. 자동차 한 대를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더미가 쓰러진다고 함.

 

2003년 문학마을

 

 


 

마경덕 시인

1954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신발論』이 당선. 시집으로 『신발論』(문학의전당,2005),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이 있다. 북한강문학상 수상. 2017년 시집 ‘사물의 입’ 세종나눔도서 선정. 현재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AK아카데미, 강남문화원 시 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