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복효근 시인 / 어떤 제다법(製茶法)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6.

복효근 시인 / 어떤 제다법(製茶法)

 

 

전주에 가면 茶門이라는 찻집이 있어

그 쥔장은 야생차를 고집하는데

그 냥반 따라 순창 회문산 야생차를 따러 갔다

여린 찻잎 다시 말하면 차의 잎

차의 입, 차의 입술

햇살과 바람과 이슬을 마시는 차나무의 입을

그 야들야들한 갓난 아이의 입술 같은 찻잎을

잔인하게 또옥똑 따는 것을 보고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어린 잎순들을 달구어진 가마솥에 넣고 덖어서

꺼내어 덕석 위에 쏟아놓고

손으로 부벼서 찻잎에 상처를 낸다

찻물이 잘 우려나오게 하기 위함이리라

그러기를 아홉 번이라

아아 잔인하고 모진 제다법이여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완성된 차를 시음해보시라

갓 만든 차를 다관에 담고 물을 붓자

영영 죽어버린 줄 알았던 찻입들이

잘 익은 물 속에

제가 마신 회문산의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다 풀어내 놓는데

아홉 번의 가마솥 모진 연단을 연록색 향기로 빚어내 놓는데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애초 나무에 매달렸던 그 형상으로 돌아가

물고기처럼 다관 속에 노니는데......

그 차를 마시고도

그 찻잎의 흉내를 한 자락이라도 내지 못할 량이면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다시는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복효근 시인 / 탱자

 

 

가시로 몸을 두른 채

귤이나 오렌지를 꿈꾼 적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밖을 향해 겨눈 칼만큼이나

늘 칼끝은 또 스스로를 향해 있어서

제 가시에 찔리고 할퀸 상처투성이다

 

탱자를 익혀온 것은

자해 아니면 고행의 시간이어서

썩어문드러질 살보다는

사리 같은 씨알뿐

 

향기는 제 상처로 말 걸어온다

 

 


 

 

복효근 시인 / 석류

 

 

누가 던져놓은 수류탄만 같구나

불발이긴 하여도

서녘 하늘까지 붉게 탄다

네 뜰에 던져놓았던

석류만한 내 심장도 그랬었거니

불발의 내 사랑이

서천까지 태우는 것을 너만 모르고

나만 모르고......

어금니 사려물고

안으로만 폭발하던 수백 톤의 사랑

혹은 적의 일지도 모를.

 

 


 

복효근(卜孝根) 시인

1962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1년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등이 있음.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 2015. 제2회 신석정문학상. 대강중학교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