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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병근 시인 / 에스컬레이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7.

정병근 시인 / 에스컬레이트

 

 

이런 것을 타본 적이 있다

 

몇날 며칠밤을

긴 침묵의 행렬속에 끼어

걸어본 적이 있다

 

안심하고 오라는,

화실표가 가리키는 저 너머에는 필경

시퍼런 작둣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이 올라왔다

 

시집 -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천년의 시작)

 

 


 

 

정병근 시인 / 옻나무

 

 

여차하면 가리라

옷깃만 스쳐도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너에게 확 옮겨 붙으리라

옮겨 붙어서 한 열흘쯤

두들두들 앓으리라

 

살이 뒤집어지고

진물이 뚝뚝 흐르도록

앓다가 씻은 듯이 나으리라

 

네 몸 속의 피톨이란 피톨은

모조리 불러내리라

불러내어 추궁하리라

 

나는 지금 휘발유 먹은 숨결,

너를 앓고 싶어 환장한 몸

 

시집-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천년의 시작)

 

 


 

 

정병근 시인 / 내 사랑은

 

 

내 사랑이 슬픈 것은

내 앞의 그대가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을 떠나서가 아니라

세월이 흐르는 것이다

 

그토록 환한 얼굴 보이지 않고

귓전에 재잘대는 그대의 목소리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다

 

진정 내 사랑이 뼈아픈 것은

내가 늙고 병들었을 때에도

그대는 옛 모습 그대로

내 안에 고스란히 있는 것이다

 

내 사랑이 정녕 두려운 것은

그대가 나를 버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죽음보다 환하게 웃는 것이다

 

 


 

정병근 시인

1962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계간 《불교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현대시학》에 〈옻나무〉外 9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천년의시작, 2002)와 『번개를 치다』(문학과지성사, 2005), 『태양의 족보』(세계사, 2010)가 있음. 제1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