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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선 시인 / 정오
오븐의 채널이 정각에서 멎는다 늦은 아침이 다 구워졌다 꽃나무 밑에서 놀던 적막은 바싹 익었다 밀가루에 버무려진 세상이 거짓말같이 부풀어오르는 시각 우체부가 달아오른 우체통을 열고 뜨거운 편지를 꺼낸다 삼십분 전에 넣은 편지가 벌써 익다니! 생의 한나절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또 숙성되었다
조말선 시인 / 폐가
안채의 주인은 어둠이다 입구마다 봉인되었던 빛은 밀려나고 한때 문지방 너머로 쓸려나가던 어둠의 자물쇠가 비명을 지른 이후 집의 내력을 말하는 문짝이 떨어져 나간 방문의 검은 입 어둠의 검은 혀가 끊임없이 널름거린다
희망을 끓여내던 밥상에 두꺼운 먼지가 차려지고 둘러앉은 어둠은 말한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폐허 쪽이다 꿈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절망이 빠르게 교체되고 희망을 떠받치던 대들보는 오랜 골다공증에 허리가 휜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관절 구석구석 추억이 삐걱이는 저녁
폐허는 익는다 감나무 붉은 열매가 절망을 익힌다 추녀 아래 필라멘트 끊긴 백열등으로 더 이상 이승의 꿈은 송전되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부터 밀려난 어둠은 도처에 흘러넘친다 죽은 이들의 인광처럼 달개비 푸른 꽃 발광하는 몰락의 시간 으깨어지는 한 쪽 어깨로 달빛도 무겁다
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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