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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애지> 신인상 김열 시인 / 말
낡은 구두 솔질하다 멈추고 본다 말표 구두藥 뚜껑 위에 그려진 앞다리 치세우고 갈기 휘날리며 달리는 흑마를 본다 따각따각 먼지 일으켜 질풍 속으로 잇달아 뚜껑을 뛰쳐나와 질풍 속으로 달려가는 말들
구두약 둥근 뚜껑 안에서 말달리도록 맨 처음 고안한 사람의 마음과 아침마다 구두를 빛나게 닦아주는 푸른 풀밭 같은 마음을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와 풀밭 위로 밤을 누이는 말들을 생각한다 아침이면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는 말들
약을 더 발라 솔질 계속하자 돌멩이 걷어차다 상처 난 구두코 반짝거리고 현관 밖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진다 누군가 금세 밖으로 나갔는지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금언처럼 따각따각 세상을 넓히며 말없이 달려가는 말들
죽기 전까지 종마는 살아있다
애지 ( 2003 가을호)
김열 시인 / 느티獸
저 느티나무는 곧장 넓고 깊은 하늘로 오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높이를 줄이고 팔을 벌려 안을 넓혀 놓았다 한 자리에 붙박혀 저와 더불어 사는 또 하나의 일생을 풀죽지 않게 다독여 왔다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본성을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고 있다 아직도 천둥 번개 치는 어둔 날이면 덩치 커진 놈이 가지들 이파리들 죄다 놀라게 하는 포효를 터뜨리다가 답답한 먹가슴 쥐어뜯는다 쩍쩍 갈라터지는 구름 속으로 비를 몰고 오는 바람 속으로 우우 속절없이 괴성을 지르며 가지들 붙잡고 뒤흔들며 머리채 뿌리친다 푸른 이파리들 뒤집히다 떨어지고 여린 팔목들 부러진다 다치고 지치고 설운 몸뚱이, 숨결 고요해지도록 속울음 울어 뿌리 끝까지 젖기도 한다
느티나무, 마을 앞에서 평상 하나 부리고 있다
김열 시인 / 여수의 잠
여수가 아니어도 좋았다 탁 트인 바닷가라면 좋았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유적처럼 떠도는 섬들과 먼 바다로 떠나는 외항선 불빛이 닿는 높은 언덕이 있는 곳이라면 더 좋았다 여수행 열차표를 다짐이듯 꼭 쥐었던 건 오랜 병을 알고 있는 항구를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때때로 선택은 미묘한 끌림이 아니었던가 창측 좌석에 내 선택을 앉혔다 열차가 레일에 묶여 미끄러지면서 밀린 잠들이 육지 끝으로 밀려감을 느꼈다
열차는 간이역 불빛 같은 상념을 뚫고 달려갔다
흐린간판불쓰러질듯서있는바닷가언덕여인숙 똑똑,헤픈잠에서깨어난포주같은눈빛을외면하고 쪽방을찾아올라가는생의관절들 따라온몇편의기억방바닥부스러기로쏟아진다 창밖불빛하나둘지우는해풍의손길에 녹슨육지를등진한척의잠 작고환한방 달처럼구부러진잠을잡으려다놓고가는파도의부드러운숨결 이불한겹한겹덮으며한자락한자락옷을벗겨내는잠 파도는반도의알몸으로밀려온다 푸른비늘들계속밀려온다
손님, 손님, 몸이 너울처럼 흔들린다 파도 일렁이는 눈으로 테를 두른 모자, 승무원이 서 있다 여기는 종착역입니다 아, 旅愁였다
김열 시인 / 열아홉 번째 불면
풀섶 제비꽃과 다섯 번 눈 맞췄다 여자는 뒤척이다 또렷한 턱선까지 이불자락을 끌어덮는다 이제 그만 이사를 가야 한다 바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눈 감고 집 안의 모든 유리창을 세어본다 밤 공중으로 열여덟 개의 유리창을 하나 둘 띄워 보내는 것이다 열여덟 개의 불면을 뚫고 와 맑게 씻겨 맺히는 별빛 하나 헤아려보는 것이다 바람을 깨워 유혹을 품는 마지막 밤이다 내일이면 이사를 가야 한다
-시집 <여수의 잠>(애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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