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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영기 시인 / 얼음 대접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7.

박영기 시인 / 얼음 대접

 

 

바람에게 머리카락 죄 뜯겨 민숭민숭한 머리통 떼구루 굴러온 해골, 나는

 

머릿속에 이빨 같은 씨앗 여러 개 박혀 있다

몇 개는 썩고 몇 개는 살을 악물고 있다

 

종일 겨울 대청마루에 앉아 골똘한 나를 너는, 모란꽃무늬백자 요강이란다 밑을 훌렁 까고 걸터앉아 내 머리에

 

오줌을 누는

 

털 난 네 입술에 쩍 달라붙는다 나는, 물고 놓지 않는다

 

 


 

 

박영기 시인 / 저수지에 빠진 얼굴이 밖의 얼굴을 알아볼 때까지

 

 

 거울 앞에 앉아, 거울의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거울의 심장이 뛸 때까지 거울의눈동자가 생길 때까지 거울의 귀가 열릴 때까지 거울의 입속에 침이 고일 때까지 거울의 입술이 벌어질 때까지 거울의 입이 말을 할 때까지 거울의 머리카락이 일렁일 때 까지 거울의 피부가 물결처럼 부드러워질 때까지 거울이 바람처럼 가벼워질 때까지 거울이 한낮처럼 뜨거울 때까지 거울이 밤처럼 벌거벗을 때까지 거울이 구름처럼 움직일 때까지 거울이 새처럼 끼룩거릴 때까지 거울이 물고기처럼 비늘이 생길 때 까지 거울이 사슴처럼 뿔이 돋을 때까지 거울이 기린처럼 목이 길어질 때까지 거울이 코끼리처럼 달릴 때까지 거울이 사자처럼 이빨을 드러낼 때까지 거울이 뱀처럼 허물 벗을 때까지 거울 앞에, 앉아

 

 


 

 

박영기 시인 / 우거지는 못

 

 

 눈동자다 연못이다 못이다 못 뒤에서 못을 뚫고 못이 나온다 퍼렇게 녹슨 못이다 자라는 못이다 잎 피는 못이다 연못을 뒤덮는 퍼런 못대가리 뚫어지게 보고 있다 오래 보고 있다 돋아난다 푸른 가시, 우거진다 푸른 가시, 눈을 깜박일 수 없다 괴기한 연은 여름에 피지 않는다 봄에 피지 않는다 가을에 피지 않는다 겨울에 피지 않는다 딱, 그! 계절에 핀다 손등이 간지러운 계절에는, 목덜미가 간지러운 계절에는, 피지 않는다 굳은살에 피가 도는 계절에도, 새파랗게 피가 끓는 계절에도, 피가 끓어 넘치는 계절에도, 피지 않는다

 

 


 

 

박영기 시인 / 길인지 개민지 뭔지

 

 

 시멘트 틈새와 풀숲을 연결하는 기인 줄, 저 줄 끊어지나 안 끊어지나, 걸음을 멈추고 가던 길 잃어버리고, 내가 섰는지 앉았는지, 저게 개민지 문장인지 뱀인지 길인지, 움직인다. 안 움직인다. 입바람 훅 불어본다. 먼지처럼 흩어진다. 개미다. 다시 모여 줄을 선다. 한 방향으로 간다. 문장이다. 반대 방향으로도 간다. 길이다. 줄은 마주 오는 줄을 비켜간다. 줄은 줄의 길을 열어준다. 줄은 줄의 짐을 받아 진다. 등이 볼록하게 휜 활이다. 낙타다. 아니다. 저 줄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휘었다 고무줄인지 리본인지, 줄에서 줄을 꺼내 줄을 잡고 간다. 손에 손잡고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막아선 목책인지, 끊을 수 없는 악연인지, 달리는 차에서 새는 검은 기름인지 뭔지. 저 줄은 아무리 말해도 줄이 안 닿는 말, 검은 주문(呪文)이다. 삭제 키속으로 달려가는 문장이다. 아니다. 막대기로 건드려본다. 서로 끌고 당겨 막대기를 타고 넘는다. 지남철이다. 끊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는 줄을 돌멩이로 꾹 눌러놓는다. 잠깐 우왕좌왕 휘돌아간다. 냇물이다. 강물이다. 아니다. 아니다. 갈수록 태산이다 나는, 앉았는지 섰는지 누웠는지 내가, 개민지 길인지

 

 


 

 

박영기 시인 / 쇼베 동굴*

 

 

아, 입을 벌리세요. 목젖이 부었습니다.

 

감(感)이 곧, 떨어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자라고 있습니다. 턱밑까지 자라면 목걸이, 발등에 닿으면 돌도끼가 됩니다.

 

발등이 찍히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삼만 년만 기다리십시오. 입을 벌린 채 다리도 벌리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동안 목젖에 시간을 기록하십시오. 당신의 시간은 달리는 발굽, 물어뜯는 이빨, 들이받는 뿔, 할퀴는 발톱입니다. 그리고

 

붉은 손도장입니다. 입구에서 뺨 일곱 대, 들어가서 다섯 대, 나오면 맞아죽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시간입니까? 오직,

감이 익어 떨어질 때까지 목젖에 집중하겠습니다.

 

다리가 저립니다. 잠깐 입을 다물어도 될까요?

 

*프랑스 동굴

 

 


 

 

박영기 시인 / 황조롱이가 왔다

 

 

집터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본다

아파트는 꼭 깎은 듯이 열을 지어 서 있다

귀를 열어놓고 말은 안 듣는다

눈을 뜨고 눈앞을 막고 서 있다 아파트는

현시現時를 현실現實을 못 본다

꿋꿋이 서 있는 게 서로 못마땅하다

승패도 안 나는 눈싸움을 밤낮없이 한다

눈썹도 까딱 않고 눈 부릅뜨고 싸운다

서로 한 치 양보가 없다 아파트는

흐르는 눈물로 뜨거운 눈알은 식힌다

거리유지를 고수하느라 밤낮 불침번을 선다

졸려도 깎은 듯이 서서 미동도 없다

아파트는 구십도 허리 꺾어 깍듯하게

인사 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 한다

고집이 황소 할애비보다 더 세다

멍청하기는 비교할 그 무엇이 없다

내가 눈 속으로 들어가 둥지 틀어도

말 한 마디 못한다 찢어진 입이 있어도

꿀 먹은 벙어리다 아파트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깎은 듯이 절벽이다

발밑에 뜯긴 비둘기 깃털이 수북하다

내가 범인이라고 오해 받겠다

내일부터 화분에서 알을 품어야겠다

 

 


 

박영기 시인

경남 하동에서 출생. 2007년 《시와 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딴전을 피우는 일곱 마리 민달팽이에게』(시인동네,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