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시인 / 둥근 울음
독곶리 돌밭해변에서 돌들이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울 때마다 모서릭 지워지는 둥근 울음 해넘이 수평선 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끄덕이며 끄덕이며 돌아섰습니다
저물녘이면 갯바위에 나앉아 속살을 적시던 사람 풀어 놓은 슬픔도 바위 아래 스며들어 모서리를 지웠을까요
가끔 파도를 앞세우고 마을 입구까지 내려갔다 혼자 돌아오는 맨살 울음
돌, 돌, 돌,
저렇게 울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남수 시인 / 청귤을 저미며
청귤 한 상자를 택배로 받았습니다 박스를 열자 푸른 동자승들이 서귀포 싱싱한 파도소리 장삼 펄럭이며 거실에 몸내를 풀었습니다 서로 자리를 양보하여 표정 하나 다치지 않고 달려온 천리 길, 바다도 하늘도 품을 크게 열어 둥글게 품었을 터 무른 상처 배달될까 잠시도 생각을 놓지 않고 한 분 한 분 보듬고 어루만진 고운 손길도 따라왔습니다 환한 침묵이 어스름을 데려오는 동안 나는 청귤을 도마 위에 올리고 여름날의 번뇌와 가을날의 무게를 칼질 합니다 누군가의 겨울을 위해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순하게 열어 주는 몸 칼날이 닿을 때마다 쏟아지는 향기가 청귤의 눈물인 줄 몰랐습니다 울지 않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 한 잔 나눠줄 수 있을까요 청귤을 저미며 나도 누군가를 위해 소리 없이 울어 줄 수 있을까 흥건한 칼질의 고뇌가 가끔 헛손질을 했습니다
김남수 시인 / 피리소리 한 사발
식혜의 배경에는 싹튼 보리가 있습니다 달콤한 한 사발의 보리피리 소리를 원한다면 서두르지 마세요 젖은 보리에서 초록 눈이 올라오는 순간 겨울의 언덕을 건너 맷돌에 부서지는 통증을 지나 엿길금 가루로 거듭 납니다
참고 기다리세요 어둠이 내리는 저녁 보리밭을 지나가는 고운 바람 한 되 체에 내리세요 한 동이 물과 만나 은근해지도록 그윽한 눈길 보낸 후 말간 보리의 눈물만 받아 하룻밤 재우세요 밤새 뒤척이던 소용돌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뜬소문도 삭아 내리면 투명한 그리움만 따라 내세요 선택된 눈물이 허기진 밥알을 만나 뜨거워지도록 배려하세요 미지근한 온도에서 끓을 수도 식을 수도 없는 발효의 시간 열어보지 마세요 해뜨는 아침부터 해지는 저녁까지 회한의 언덕을 지나 두둥실 떠오른 사랑 까칠한 신경질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뜨거운 불에 한 번 더 올리세요 우르르 일어서는 덜 삭은 잡념 걷어내면 밥알 동동 들통에서 휘- 피리소리 한 줄기 남도의 푸른 들녘이 출렁입니다 눈물의 언덕을 건너,
인고의 피리 소리 한 사발
김남수 시인 / 호박꽃 환승역
상가 밀집 골목에 세들었던 으슥한 어둠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둘러앉은 꽁초, 빈 소주병, 거나한 운동화짝… 사내가 들어선지 사나흘 만에 우중충한 예닐곱 평 깨진 시멘트 바닥에 햇살이 허리춤을 풀기 시작했다.
어제는 축! 개업, 후줄근한 행운목이 이사 오더니 어느새 목 꺾인 군자란, 금간 영산홍, 누렇게 뜬 소철이 뒤따라 들어왔다. 도시가 뱉어낸 공터, 상처 하나씩 매달고 어느 후미진 대문 밖 납작 엎드렸던 것들이 하나 둘 터를 잡자, 멀리 떠난 여치 울음이 돌아오고 산달 꽉 찬 고양이가 해거름을 물고 들어섰다.
실직한 사내가 물뿌리개 앞세우고 아침보다 먼저 출근하는 풍경 속 절반을 놓아버린 목숨들이 파랗게 일어서고, 깨진 화분이 밀어올린 넝쿨손 노란 등을 켠다. 길이 꽉 막혀버린 저 사내도 봄이 오면, 호박꽃 환한 줄을 잡고 싱싱한 도시로 환승할 것이다.
김남수 시인 / 물걸리 안부를 묻다
읍내 차부에 급하게 전화 걸면, 오 분 아니 십 분이라도 기다려주던 버스를 타고 물걸리를 가고 싶네. 홍천강이 숨바꼭질하며 따라나서는 면사무소 4H팻말 앞,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 버스는 시동을 접고,
"감나무집 손녀 여적찌 공부 안 끝났드래요"
기사양반 나무 아래 앉아 담배 한 개비 꺼내 물고, 나는 햇살 동동 떠다니는 다슬기점방에 내려가 물걸리 신교장님은 안녕하신가? 안부를 묻는 사이, 영희를 데리러 간 할머니를 또 다른 할머니가 데리러 가고 버스는 그러려니 눌러 앉아있고, 처녀포대기끈처럼 첩첩 산 둘러업고 똬리 튼 외길 빙빙 돌아가면 가을을 꾹꾹 눌러 담은 마대자루 두엇 서있고, 한참을 기다리면 저만치서 등 굽은 몸빼바지 손사래 치며 다가오고,
지금도 손전화 깜빡깜빡 조는 외길, 낙엽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을과 겨울 사이 그 길을 걷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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