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 / 독신자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마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모든 영혼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것, 풀도 이슬도 우주로 돌아가, 돌아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
잊어야 할까 봐 나는 너를 잊어야 할까 봐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으니까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유고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고정희 시인 / 고백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 시인 / 새 시대 주기도문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가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가 된 것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복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본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사옵니다(상향~)
고정희 시인 / 밥과 자본주의-평화를 위한 묵상기도
어둠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악령이 깃을 치는 땅으로 첫 열 두 제자를 파송하던 날의 그리스도 마음을 묵상합니다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돈주머니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양식자루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여벌 신발도 지니지 말아라, 분부하신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그것이 평화의 길인 줄 그것이 평화의 길인 줄
추수할 곡식은 익어가는데 일꾼이 너무 적구나, 적구나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 날의 그리스도 말씀을 묵상합니다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배척하는 집에 머물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모르는 식탁에 앉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외면하는 땅에서 묻은 신발의 먼지도 다 털어 버려라, 당부하신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그것이 평화의 삶인 줄 그것이 평화의 삶인 줄
우리의 소원은 평화 꿈에도 소원은 평화통일 칠천만 겨레 삼천리 외침 속에 그리스도 말씀 들려옵니다
너희가 입으로는 평화를 원하면서 마음엔 두 주인을 섬기고 있구나 진실로 평화를 원하거든 너희의 밥그릇을 가지지 말며 진실로 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돈주머니를 챙기지 말며 진실로 평화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천국을 꿈꾸지 말아라, 이르시는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부름인 줄 이것이 평화의 부름인 줄
―유고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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