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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네잎 시인 / 흘러내리는 포물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7.

김네잎 시인 / 흘러내리는 포물선

 

 

넌 난생이잖니, 당신이 말해 놓고 가자 난 알 속에 갇히고 말았어요

 

정점에, 나는 정교하게 달을 그려 넣지요 달이 자라기 시작하는 환절기에는 비가 자주 왔어요 우산을 잃어버리기 좋은 날들이었고 창문은 열리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무지개가 거꾸로 떴더구나, 당신은 자라는 달을 외면하며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꼭짓점에 손을 얹으면 먼 곳의 당신은 흐물거렸어요 여기의 아침과 거기의 아침은 서로 적막하고 한 생과 한 생에 이르는 거리가 같은 체온의 자취, 당신에게 배제된 달은 나의 노래, 그런데 나는 왜 이 노래가 두려워질까요?

 

머리칼을 자르러 가요 햇살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궤적을 따라서 다녀온 눈빛이에요 아직 난 미숙이에요 미약한 껍질조차 없는, 당신이 알 하나 품은 게 잘못이지요 깨지고 나서 울게 되는 건 매번 당신이잖아요

 

 


 

 

김네잎 시인 / 산책

 

 

하나의 주머니 속에서 우리가 손을 잡을 때

무성한 내 죄를 들킬 것만 같아

장갑을 꺼내지 않았지

 

죄가 한 번 더 축축해졌지

 

발바닥이 넘쳐나는 숲으로 들어갔지

 

숲은 더 깊은 곳으로

쓸모없는 족문들을 불러 모아서

 

숲 너머 숲엔

새들이 거꾸로 매달려 발목을 감춘 것들을 기다렸고

 

주문에 걸린 듯 사람들은 일렬로 뒤돌아보지 않았지

 

우리는 나란히 나란히 걸으며

나란히를 증명했지

발바닥으로부터 손끝까지 올라온 시린 죄를 고백했지

 

차라리 늪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대로 유령을 삼키면 좋을 텐데

 

이 숲엔 온통

가는 발자국과 돌아오는 발자국이 있는데

멈춘 발자국은 하나도 없었지

 

계간 《미네르바》 2017년 겨울호

 

 


 

김네잎 시인

한국방송통신대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2016 《영주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새김 동인. <부평사람들> 취재기자. 공저시집 『한 치 혹은 반 치』 2019년 전국계간문예지 작품상 수상. 현 계간지 『열린시학』 편집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