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용 시인 / 춘천에서 만나요
자고 난 후 스며드는 또 다른 잠과 평화에 이르러서야 다시 찾아오는 평화, 언니, 염혜지焰慧地에 접어든 자비로운 손이 양피지 위의 석회수처럼 속을 태우며 말라가요 던져진 돌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호수는 행과 불행의 경계를 지우고 찬 공기에 이끌려온 허공의 소리들이 두 발의 열로 부풀어 오른 세상을 떨고 있어요 핏기 없는 불면을 일으켜 앉히고 죽을 떠먹이다가 언니는 역류라는 말에 컵의 물을 절반이나 쏟았지요 네 육체로 내가 아픈 것이니, 우리는 늘 잘못된 길을 달리다 넘어질 것이니, 낯설고 불안했지만 언니의 고백은 언제나 환하고 아름다웠어요 한 때는 사막의 별자리였으며 눈이라 연상되는 것들을 모아 궤짝을 짜면 그 속에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이기도 했던 당신, 얼마나 고요한 시간에 눈을 맞추어야 우리는 물의 입구가 되어 있을까요 비도 없이 비가 내리는데 오래된 옷가지의 묵은 냄새는 안간힘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요 식도가 붓고 식은땀이 나던 걸요 몹시 살도 빠졌어요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들어주는 것이 전부인 위로지만 그보다 먼 길을 걸어왔으니까요 가령, 혼자 있는 게 무서울 때 오는 병들이 있잖아요 언니는 아프다 아픔은 숨겨야 한다 아픔을 감출 수 있을 때까지가 인연이란다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알아챌 때까지가 축복이란다 산양의 묽은 젖 한 방울 같은 밤에도 우리는 다시 태어나려고 애를 쓰는데, 오늘은 우두커니 남아있는 빈집으로 돌아오는 흰개미들의 순례를 바람으로만 들었어요 약속이 금지된 세상에서의 약속은 자신의 고대로 넘어가는 언덕 같은 것인지, 잠 없는 잠과 뼈아픈 평화, 하얀 시트 위에서 사라진 마을과 아직 생기지 않은 도시에 관해서 묻고 싶어요 그리고 언니, 우리의 황홀한 운명에 관해서도요 정말 먼 길을 걸어왔네요 춘천으로 가요 느닷없이 피와 살과 뼈가 되어버린 어느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계절에
ps. 어쩌면 당신은 내가 없어진 이후 잠시 나를 다녀간 생각인지도 모르겠어요
김관용 시인 / 바늘
턴테이블
부풀어 있던 풍선을 터뜨리자 갇혀있던 비명이 쏟아졌다 풍선은 조용한 숲이었다 죄를 짓기 위해 기도하는 걸까 검은 빙판을 돌면 긁힌 상처를 만지고 싶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목이 길어진 침묵 발끝으로 서서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멀리까지 다녀온 낮은 음들을 항생제로 덮어주었다
시계제작소
안개의 흔적인 듯 아니면 어떤 눈보라인 듯 수술실을 나온 쓸쓸한 몸 자신의 낭떠러지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턱선을 따라 비가 내렸다 심장이 아니었다 비가 오는데 남은 밥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뜨거운 영혼과 마주친다 너를 생각했던 몇 초에서부터 나를 담았던 우주가 꺼지는 순간까지 목에 걸린 시간이컥컥거렸다
정든 수술실에서
나의 맞은편을 만나면 흰 솜을 꺼내 입술을 닦아줄 것이다 칼을 든 자에게 가슴을 내밀던 호수, 아니 뭉클한 달빛 아주 먼 옛날 침엽수림의 냄새 같은 거 한 때 우리는 캄캄한 방에 들어서며 녹슨 피의 지퍼를 열었다 녹색 테이블 위에서 더운 위장을 고백할 때까지, 너를 경험한 외지에서야 피를 터뜨렸다 밤의 내부는 흙먼지가 가득 날리는 음반 같은 거다 그렇게 믿는 거다 이유가 있어서도 목적이 있어서도 아닌 공원의 좁은 길처럼 벗어놓은 속옷에서 조금씩 희미해지는 냄새처럼 익숙한
조용한 숲
그녀가 선인장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내부가 비어있는 철골을 바라보듯 제 몸의 열을 이해하는 일은 외롭다 내일이면 내일의 몸이 열리고 누군가 다녀간 문장은 공기로 채워진 수조 같다 그러나 끝내 귓속으로 들어간 베케트의 우울은 희극으로만 읽혔다 미친 듯이 웃으며 나는 벌써 깨어 있는데 악몽의 좁은 틈으로 링거액이 흘러들었다 6인실 병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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