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기록 시인 / 잃어버린 열쇠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7.

이기록 시인 / 잃어버린 열쇠

 

 

난 오늘도 벽에 누운 채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밤새 빗방울 사이로 대화들이 끊기듯 이어지고 있었다

창문은 언제부터 열린 것인지

흐트러진 몸은 물에 젖었다

어디로 통하는 문인지 살며시 들어왔던 당신의 눈매를 잊을 수 없다

무슨 생각으로 하염없이 이름을 부르는지

돌아보지 않은 것이 당신에게 가장 근접한 일이었다

갈퀴가 자란 당신을 만났으나

하찮은 일이라는 건 없었다

 

돌아보지 않은 벽들이 더듬거리며 떠돈다

기억하고 있다 말하는 건 변명이 분명하기에

난 유령과 조우한 것이다 튀어오르는 벽들

눈 안 가득한 벽들을 두드렸지만 비겁했다

같은 대답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게 돋은 바늘들이 혈관을 따라

미처 떠나지 못한 웃음들과 누웠다

일어나지 않는 당신을 위해

 

단 한 번도 당신을 기억한 적 없었다

낡은 침대에서 슬픔이 닳아가는 순간을 만끽하고 있을 뿐

끽끽대는 침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 때까지

 

사라진 당신과 함께 누워있을 뿐이었다

감은 눈들이 인지하는 대로 바람이 분다

밤새 잃어버린 열쇠를 찾고 있다

 

 


 

 

이기록 시인 / Ghetto

 

 

사금파리들을 잡아 네 몸에 붙이면

사냥이 시작된다 지도를 따라 개들이 짖기 시작하고

바닥에 떨어진 꿈들이 돌아본다

손에 나비를 들자 아늑한 심장이 튀어나와 아득하게 쓰러진다

없는 자리에서 기름이 배어나온다

가죽은 얇아지는데

내다버린 무릎은 쓰레기통을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걸음을 걷는 게 비겁한 것임을

 

비릿한 불들이 퍼진다

완벽하게 뚫린 말들은 굴절되어 흐르고

목련이 날카로울수록 한쪽 눈을 감아버린다

어머니의 이불은 언제 삭았는지

아무도 해치지 않는 골목에서 환영을 삼켜대며

쌓았다가 허물기를 반복한다

 

봄은 엉겨 붙지 않았고

널찍한 시간이 꽃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달콤하게 묻힌다

 

 


 

 

이기록 시인 / 잊다

 

 

밀린 꿈들을 꺼내 햇볕에 말려둡니다

 

빈집은 요란하진 않아

눅눅했던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두지요

목덜미는 자주 부풀어

자줏빛 모란 안에 들어가

온몸을 밤새 쏟아냅니다

 

겹친 얼굴을 오래 앓자

흐릿한 사람이었다는 위안이 옵니다

헐거워진 편지들을 뒤적이는데

사납던 혀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비워둔 이름만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모여들지요

 

그제야

오래도록 금이 갑니다 늘 아름다웠어요

 

 


 

 

이기록 시인 / 제 몸을 태우는 그늘

 

 

 팬티를 뒤집어 입었다 네가 너무 잘 알고 있다 느낀 새벽 말린 우산에서 가시가 돋았고 주머니가 부어올랐다 침묵을 눕혀 두고 꽁꽁 묶었다 골방에서는 매번 재가 피었다고 기억했지만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새들이 날고 있는 푸석한 자궁 배우지 못한 표정들을 깨우기 위해 밤새 비가 내렸다 신앙은 여전히 없었고 잔물은 팻말 쪽으로만 흘렀다 빛 따윈 흉터처럼 가늘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시(詩)는 병색이 완연했다 휘파람을 불던 새벽이었다 나는 송곳니를 물었고 목젖에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언어가 실어증에 걸렸다 퇴화하는 욕조에서 암각화가 출토되었다 아직 문을 열지 못했고 낱장 떨어지는 문양들이 머리를 물고 있었다

 

 


 

 

이기록 시인 / 시

 

 

나는 죽었다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수산시장에서

횟감의 가격을 흥정했다

살점이 투명할수록 가격은 높았다

나는 검게 마른 살점을 토막 내듯

훑어내리고 있었다

 

 


 

 

이기록 시인 / 같은 사람

 

 

 그는 손가락을 잘라두고 나왔다 거리는 가볍고 분노는 무거웠으니 말을 하는 순간 들리는 건 더듬거리는 침묵이었다 아직 제대로 빌려준 적 없는 몸을 들고 누구보다 바스락거릴 문장은 천천히, 지정된 코스를 따라 두근대고 있었다 한 번도 뱉은 적 없는 말을 찾아다녔다 문을 열려는 사람은 어디서든 등장했지만 안개는 깊이 패였다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오늘로 돌아왔지만 이동의 순간엔 소음이 제격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바위틈으로 차들이 밀려왔다 밀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소식은 계속 지정된 곳으로 옮겨졌지만 떠날 곳은 정해두었다 다리는 없던 것처럼 문은 열렸다 닫혔고 어제와 오늘 사이가 너무 멀어서 이야기는 골목을 따라 부유했다 흘러가는 꿈들이 구두인지 슬리퍼인지 묵묵히 생각을 안고 엷붉은 단어들을 펼쳐 들었다 가벼워지자 얼음을 잔뜩 물고 건조한 사체를 떨어뜨렸다 그 위로 주택은 끊임없이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기다렸지만 여전히 불명이었다

 

무덤에서 썩지 않는 심장을 이식했다 당신 슬픔 진 유골속,

 

 


 

이기록 시인

제24회 <시와사상> 신인상 당선. 시집 『소란』 (2020년 12월 책읽는저녁). 『작가와사회』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