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월 시인 / 애기똥풀꽃
초가을 바람에 싯푸래진 저 볼기짝들 봐 간밤 내내 애기별들 별똥별똥! 떨어지고 있다
길가나 산 속 노오랗게 피어나는 애기똥풀 실바람에 칭얼대는 저 소리 계곡 물소리보다 더 맑은, 주저주저 꽃 한 송이 꺾는다 물컹 배어나는 향기 첫아이 엄마인 듯 가슴 푸근하게 설렌다
갓난아기 적 기저귀에 따끈한 똥 한 무더기 싸 놓고 입술 파래지도록 울고 있는 내 별들
송시월 시인 / 애기 풀새
옥상 구석 빈 분에 돋는 풀을 뽑다가 멈칫, 손끝에 찌르르 전해오는 떨림, 어! 이건 초록 새다. 새 잎의 날개 활짝 펴 종 종 종 발레를 하는 풀, 내 손등을 간지럼 태우는 풀, 흙에서 막 깨어 난 풀에게 "애기 풀새야"하고 부르면 이슬눈으로 나와 눈맞춤을 한다. 어느새 내 눈이 투명해져 보이는 것마다 참 맑다. 이때,포르르 날아 내리는 한 무리의 참새 떼, 무어라무어라 재재거림에 내 입술이 간지럽다.
송시월 시인 / 風, 楓, 풍자에 대하여
風자에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여름과 가을 사이, 삐꺽이는 소리가 난다 매미들의 토막울음 소리 내 손바닥 허물 벗는 소리 며칠 전 제대한 아이가 긴장과 이완의 골에서 흔들리는 소리
여름과 가을, 그 사잇길로 태풍이 몇 차례를 지날 때 발부리에 채이는 감나무 밑의 풋감처럼, 설익어 뱉어진 내 언어들도 지금쯤 누군가의 발 밑에서 나뒹굴거나 으깨지고 있을까? 할 말은 해야한다고,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한다고, 혀와 입술이 밀고 당기며 삐그덕 소리를 낸다
楓자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나무들 초록빛깔 벗는 소리 제 몸 다 태워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불길 번져 하늘 끝 타는 소리 風, 楓, 풍! 획과 획을 통과하는 소리 소리들
송시월 시인 / bill, 빌빌거리다
쉴새없이 날아드는 bill, 빌, 청구서들 카드결제 청구서 건강보험 고지서 국민연금 전화요금 전기료 오물세 수도료 신문대금 할부금 소득세 빌의 숫자들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빌빌거리다 한 달이 가고 일년이 가고 한 생이 가고
가을이 내게 청구서를 보내온다 문틈으로 햇살의 종이 쪽지를 들이밀다가 바람이 활짝 창문을 열어 제치다가 아예 빚쟁이처럼 안방까지 퍼질러 앉는다 가을 내내 빌빌거리는 내게 더덕더덕 붙여오는 붉거나 노오란 낙엽 딱지들, 나는 전신 차압되었다 이제 몸도 마음도 내 뜻대로 어찌할 수 없는, 1400g의 뇌가 온갖 청구서의 무게에 빌빌거리다 머지 않아 부도 처리될 것이다 풀처럼 꽃처럼 bill, 빌,
이륙하는 비행기의 굉음소리
송시월 시인 / 청사과
지하철 1호선 청량리 역 청사과빛 둥근 하늘이 승강기 틈으로 굴러 떨어진다 진동음 철거덕 철거덕, 지긋이 눈을 감은 순간, 내 입에서 주르륵 신물이 흐른다 눈을 뜬다 철로의 틈바구니 파문처럼 번지는 푸르고 시큼한 저 하늘의 입자들 역내에 온통 부서진 하늘이 널려 있다 나는 2번 출구로 빠져나온다 청사과빛 초가을 하늘에 피라미드형으로 쌓인 노점의 과일가게, 내가 볼륨 2개를 빼내자 와르르 무너지는 오후 2시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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