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란 시인 / 은사시나무
'난 은사시나무를 본 적이 없어'
어느 날 거실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난 은사시나무를 아는 것 같애'
나는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낮게 말했다 "은사시나무"
갑자기 거실 한복판이 쫙 갈라지고 은사시나무가 솟아나왔다
난 은사시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은사시나무가 은종을 마구 흔들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은사시나무가 내 몸뚱이를 들어올려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았다 은사시나무가 내 자궁에 손을 쑥 집어넣고 당신을 끄집어냈다 은사시나무가 당신을 맞은편 가지에 매달았다 난 당신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물이 내 영혼을 다 녹여낼 때까지 그리곤 보았지 당신과 나 눈길 만나는 곳에서 눈물의 길을 타고 나-당신, 당신-나가 하나씩 태어나는 것
은사시나무가 나를 동쪽으로 당신을 서쪽으로 나-당신을 부쪽으로 당신-나를 남쪽으로 집어던지는 것
우리 거실 네 귀퉁이에 그렇게 우리 네 사람 살고 있지
은사시나무 가운데 두고 거실은 매일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네
은종은 전생까지 후생까지 오며가며 울리네
'난 은사시나무야' 난 살며 생각하네 고요한 말이 내 마음 가득히 가득차 있네
김정란 시인 / 나비의 꿈
나비를 보았다. 깊은 밤, 내 숨소리 허공을 향해 올라갔을 때. 우리의 기질이 나비의 날개를 가진다면 우리는 다만 있는 일만으로 족하리라. 왜냐하면 버려버릴 것을 모두 가벼운 날갯짓으로 벗어버린 후에 우리는 알몸으로 비로소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그때에 내가 내 육체를 향해 새삼스러이 말을 걸리라. "안녕! 예쁜 나여!" 나비는 언제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다. "가능하면 더 깊은 곳을" 어느 날인가 나는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어째서지?" "잘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 그리고 그는 날아갔다. 나는 덜덜덜 흔들렸다. 그리고 조금 뒤엔 바람이 칠흙이 그리고 핵이 남았다. 꿈꾸는 핵 나는 다시 나비를 보았다, 아니 오히려 가졌다. 내가 모든 여행길의 돌짝밭에서 돌아올 때 조심스러운 비상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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