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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란 시인 / 은사시나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8.

김정란 시인 / 은사시나무

 

 

'난 은사시나무를 본 적이 없어'

 

어느 날 거실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난 은사시나무를 아는 것 같애'

 

나는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낮게 말했다

"은사시나무"

 

갑자기 거실 한복판이 쫙 갈라지고

은사시나무가 솟아나왔다

 

난 은사시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은사시나무가 은종을 마구 흔들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은사시나무가 내 몸뚱이를 들어올려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았다

은사시나무가 내 자궁에 손을 쑥 집어넣고 당신을 끄집어냈다

은사시나무가 당신을 맞은편 가지에 매달았다 난 당신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물이 내 영혼을 다 녹여낼 때까지

그리곤 보았지 당신과 나 눈길 만나는 곳에서

눈물의 길을 타고 나-당신, 당신-나가 하나씩 태어나는 것

 

은사시나무가 나를 동쪽으로 당신을 서쪽으로

나-당신을 부쪽으로 당신-나를 남쪽으로 집어던지는 것

 

우리 거실 네 귀퉁이에 그렇게 우리 네 사람 살고 있지

 

은사시나무 가운데 두고 거실은 매일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네

 

은종은 전생까지 후생까지 오며가며 울리네

 

'난 은사시나무야'

난 살며 생각하네 고요한 말이 내 마음 가득히 가득차 있네

 

 


 

 

김정란 시인 / 나비의 꿈

 

 

나비를 보았다.

깊은 밤, 내 숨소리 허공을 향해 올라갔을 때.

우리의 기질이 나비의 날개를 가진다면

우리는 다만 있는 일만으로 족하리라. 왜냐하면

버려버릴 것을 모두 가벼운 날갯짓으로 벗어버린 후에

우리는 알몸으로 비로소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그때에 내가 내 육체를 향해 새삼스러이 말을 걸리라.

"안녕! 예쁜 나여!"

나비는 언제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다.

"가능하면 더 깊은 곳을"

어느 날인가 나는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어째서지?"

"잘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

그리고 그는 날아갔다.

나는 덜덜덜 흔들렸다.

그리고 조금 뒤엔 바람이 칠흙이 그리고 핵이 남았다.

꿈꾸는

나는 다시 나비를 보았다, 아니 오히려 가졌다.

내가 모든 여행길의 돌짝밭에서 돌아올 때

조심스러운 비상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김정란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시인이자 평론가, 번역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3년부터 상지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로 활동. 1976년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선보임.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1989) 『매혹, 혹은 겹침』(1992)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1997) 『스·타·카·토· 내 영혼』(1999) 등. 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미완의 시학』(1993), 사회 문화 에세이집 『거품 아래로 깊이』(1998) 등을 펴냄.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번역부문) 수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