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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명옥 시인 / 호흡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8.

안명옥 시인 / 호흡들

 

 

누가 내 샅을 열어 여린 숨을 숨 쉬고

샅 아래 풀숲이 아름답다고

얼굴 파묻고 오래 들여다본다

 

절벽과 절벽 사이 골짜기가 있고

깊은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그 틈에서 메아리도 생기고

 

자고 일어나면 꽃들이 지고 피고

깨진 창틈으로 가벼운 새들은 날아오르고

내가 버린 철학처럼 비가 내리고 그치고

 

건넛집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

아래층 못 박는 소리 고요를 깨고

산 개울 상공에 머무르던 물총새

날쌔게 물을 뚫고 뛰어들고

 

허공에 틈을 내어 바람이 들어와 살고

비바람으로 섞이며 한 몸으로 뒹굴더니

샅에서 내가 태어나고

노란 민들레가 태어나고

 

샅으로 순환되는 호흡들

틈으로 통풍되는 사람살이들

 

허공이 있어야 지구가 굴러가고 무지개가 뜨고

텅 빈 들판을 멀리 바라보는 것도 사는 방식

 

 


 

 

안명옥 시인 / 카프카 동물원

 

 

조련사는 공에 바람을 넣어주고

공연을 해야

바나나 하나를 먹게 해주고

낡은 침대에 누울 수가 있다

 

꿈을 꾼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번 삶에서 맡았던 가면을 벗고

무대 뒤에서 다음 배역을 준비할지도 몰라

 

동물원 안이 가장 안전하고

이대로 삶도 괜찮다고 주문을 외워

햇살 아래 명상하듯 이를 잡다가도

우리 밖 자신을 보는 사람 구경하는 걸 즐겨

 

공을 굴리지 않아도 되는 날은 아픈 날뿐

자연을 가둔 포로수용소에서

바라는 것은

동물원에서 태어났으니 동물원에서 죽고 싶은 것

 

해는 넘어가도 여전히 남아있는 붉은 노을

이제 공 굴리기는 한물가고

무얼 해서 바나나를 먹을까 고민하는 저녁

까마귀* 한 마리 동물원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 까마귀는 체코어로 카프카다

 

 


 

안명옥 시인

1964년 경기도 화성 출생.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석사수학, 2002년도 <시와시학> 전국신춘문예 공모로 시 당선. 성균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서사시집 『소서노(召西奴』와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칼』과 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금방울전』『파한집과 보한집』이 있음. 현재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창과 전문교사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