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옥 시인 / 호흡들
누가 내 샅을 열어 여린 숨을 숨 쉬고 샅 아래 풀숲이 아름답다고 얼굴 파묻고 오래 들여다본다
절벽과 절벽 사이 골짜기가 있고 깊은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그 틈에서 메아리도 생기고
자고 일어나면 꽃들이 지고 피고 깨진 창틈으로 가벼운 새들은 날아오르고 내가 버린 철학처럼 비가 내리고 그치고
건넛집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 아래층 못 박는 소리 고요를 깨고 산 개울 상공에 머무르던 물총새 날쌔게 물을 뚫고 뛰어들고
허공에 틈을 내어 바람이 들어와 살고 비바람으로 섞이며 한 몸으로 뒹굴더니 샅에서 내가 태어나고 노란 민들레가 태어나고
샅으로 순환되는 호흡들 틈으로 통풍되는 사람살이들
허공이 있어야 지구가 굴러가고 무지개가 뜨고 텅 빈 들판을 멀리 바라보는 것도 사는 방식
안명옥 시인 / 카프카 동물원
조련사는 공에 바람을 넣어주고 공연을 해야 바나나 하나를 먹게 해주고 낡은 침대에 누울 수가 있다
꿈을 꾼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번 삶에서 맡았던 가면을 벗고 무대 뒤에서 다음 배역을 준비할지도 몰라
동물원 안이 가장 안전하고 이대로 삶도 괜찮다고 주문을 외워 햇살 아래 명상하듯 이를 잡다가도 우리 밖 자신을 보는 사람 구경하는 걸 즐겨
공을 굴리지 않아도 되는 날은 아픈 날뿐 자연을 가둔 포로수용소에서 바라는 것은 동물원에서 태어났으니 동물원에서 죽고 싶은 것
해는 넘어가도 여전히 남아있는 붉은 노을 이제 공 굴리기는 한물가고 무얼 해서 바나나를 먹을까 고민하는 저녁 까마귀* 한 마리 동물원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 까마귀는 체코어로 카프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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