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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세정 시인 / 스톱워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8.

문세정 시인 / 스톱워치

 

 

시계가 멈추자 하루가 단순해졌다

갑자기 넓어진 다이어리,

아침 점심 저녁의 순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 때나 해와 달을 떠올리다가

식빵을 펼쳐놓고 블루베리 잼을 듬뿍 발라 먹었다

언제 출근을 했는지, 퇴근을 하긴 한 건지

아직도 시간과 시각을 구분하지 못해

어린 나는 아버지한테 계속 혼나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오해는 결국 시간에 대한 오해

미안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그래도

죽은 화분에 물 주는 걸 포기할 순 없다니까요

잠깐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뀔 즈음

거리엔 막 이별을 끝낸 사람들이 비둘기처럼 모여들었고

우리는 휴가계획을 짜느라 눈썹이 녹는 줄도 몰랐다

복잡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이

그걸 알면서 우린 왜 캐주얼하지 못한 걸까

마지막 질문에 난 아직 답변을 못하고 있는데

눈은 다시 비로 바뀌고

그러다 마침내 비가 멈추자 일기도가 단순해졌다

아무 때나 개기일식이 찾아오던

한 시절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지나가는 중이다

 

《시인세계》2012년 가을호

 

 


 

 

문세정 시인 / 마른 우물

 

 

도시로 이주하고부터 안구건조증이 심해졌다

 

사막 속을 걷는 날이 많았다

 

떨어진 꽃잎을 주워 유리병에 밀봉해 두었다

새로 개발한 눈물제조법이다

 

그러나 아직은 눈물이 숙성되기 전이라서

되도록 슬픈 사연은 피했고

영정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입으로만 통곡했다

 

세상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잎은 서둘러 단풍이 들고

플라스틱 화분에서 종이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피도 눈물도 없나봐

낙타눈썹을 길게 붙인 여자애들이 지나가며 말했다

 

적응은 빠를수록 좋은 거야

나는 천천히 걸으며 중얼거렸다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계간문예 《다층》2008 여름

 

 


 

문세정 시인

인천에서 출생. 경기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예수를 리메이크하다』(문학세계사, 200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