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시하 시인 / 십일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8.

박시하 시인 / 십일월

 

 

젖은 낙엽에서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한 채

누군가의 얼굴을 길게 그렸다

보석처럼 빛나는 젖은 낙엽에서

가느라단 비명처럼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등이 지진처럼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투명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이렇게 자꾸만 열리는

 

푸른 문을 많이 갖고 있어도 되는 걸까

 

낙엽을 밟으면 젖은 발자국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죽은 잎사귀들이 살아간다고 믿어서

그들에게 무게를 지우고

천천히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삶이 있을까

그런데도 열리는 문은 무엇일까

저 차갑고 선명한 문은

왜 닫히지 않는 걸까

 

 


 

 

박시하 시인 / 전생

 

 

한 마리 버려진 개로서

교회당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적이 있다

빗줄기 사이에서

무언가 희게 펄럭인 걸 기억한다

발은 꺾였고 눈은 멀었는데

 

어찌 볼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교회당 그늘에서 숨죽인

타락한 천사였다

이제는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것을

너무도 사랑하여 벌을 받았다

 

지상의 것

 

더럽고 추악했을 텐데

어찌 사랑했을까

 

개의 멀어버린 눈 속에

깃들어 푸르른 죄악

 

사랑했으니

인간으로 태어남이 마땅했을 것이다

 

 


 

 

박시하 시인 / 검은 산

 

 

창밖에 검은 산이 있네요

 

자전거를 끌고 한 사람이 지나가고

꽃들이 먼지처럼 만발해요

먼 지붕이 이별의 노래를 불러요

어떤 별은 폭발하고

어떤 파도는 흰 포말을 일으키고

 

지나가는 이여,

모르는 사람들이여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어디선가 고양이가 죽어가고

모든 별에서 온기가 사라지는데

 

우리는 웃으며

마지막으로 꽃을 세는 사람이 돼요

볼 수 없는 사람이 돼요

 

부드바에서 슬픈 술을 마시면

웃음은 음악이 되나요

별처럼 멀리에서

포말처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같은 동경을 품고

같은 공허를 품고

같은 허기에 시달리는 우리

 

웃음은 감쪽같이 사라져요

 

울면서 서성이는 밤

모르는 장소에서 창밖을 봐요

멀리 보이는 검은 산을

벅차게 기다려요

 

 


 

 

박시하 시인 / 여름의 주검

 

 

한 주검을 통해 여름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리 울음소리만큼 분명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유일한 여름이 었습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이상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노란 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반투명한 사실에 대한 그 여름에  세계는 저녁의 거울처럼 두렵…

 

한 주검을 통해

여름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리 울음소리만큼 분명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유일한 여름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이상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노란 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반투명한 사실에 대한

 

그 여름에 세계는

저녁의 거울처럼 두렵고

훌륭한 죽음이 되어갔습니다

 

 


 

 

박시하 시인 / 콜 니드라이의 안경

 

 

나는 작은 걸음을 걸어서

컵 위에, 냉장고 위에 안경을 놓는다

그럴 때 안경의 여행은 길다

콜 니드라이 나무 위에도

나는 안경을 놓는다

 

나의 죽은,

죽어서 살아 있던 나무

안경은 보지 않고 보인다

까만 아기 양처럼

온순하게 자리에 놓여 있다

 

누군가 내게 안경을 쓰라고 하지만

그건 안경을 보라는 말일까?

나무는 안경을 쓰고 무엇을 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안경에 비친 눈물을 본다

 

죽은 나무의 눈빛이

내게 들어와

그와 눈을 맞추고

살결에 입을 맞춘다

나무의 여행은 오래되었고

그 숨결은 거칠다

누군가 그를 통해 나를 본다면

울고 있구나

햇빛이 너를 통과해서

웃고 있구나

 

죽은 나무에게 숨을 얹는다

그가 나보다 더 먼 여행을 할 것이기에

언젠가 그의 날에

그는 내게 걸어와 안경을 건네겠지

우주처럼

빛나는 안경을

 

살아 있는 그림자를 나는 볼 것이다

그 사랑을

사라지는 빛은 노란색이고

그림자는 검고 검다

 

 


 

박시하 시인

1972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2008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눈사람의 사회』(문예중앙, 2012),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가 있음. 산문집 『지하철 독서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