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하 시인 / 노을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항구다 네 모습이 붉다 내 모습도 붉다
무수한 생명이 남겨놓은 소리 양면성을 지닌 발자국 소리가 빛의 균열에 순응하면 파르르 오감을 느끼는 노을 속 구멍들 먼 바다를 향해 붉은 깃을 세운다
펄럭거리던 돛, 아득히 밀려드는 섬의 물결 지나간 시간, 어스름의 메아리는 그리움보다 쓰라린 공터의 사색을 즐기겠구나, 검은 울음을 다 토해낸 구멍 많은 어느 당산나무처럼
너와 나의 거리가 멀수록 은밀히 포효하는 형상인가, 끼룩끼룩 기러기 떼 날아올라 우리 자리를 힘차게 다독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이다 앞뒤가 충만한 황홀함으로 더 깊이 더 가벼운 안식으로
또 다른 계절의 문이 숨을 크게 몰아쉰다 네 모습이 편안하다 내 모습도 편안하다
이강하 시인 / 안개에 들다
삶의 저편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수백 개 푸른 눈을 반짝거리며 채찍을 휘두르는 마차의 방울 소리는 속도와 어둠을 사수하는 밀림의 폭포
흰 장막을 치며 깊어가는 밤을 기습 공격한다 안개의 구릉들이 새부리를 꽂은 기수지역이 죽음보다 깊은 늪에서 몸서리친다 뜨거웠다 다시 차가워지는 흐름의 구석
분명한 것과 분명하지 않는 예감은 과거의 무게로 자라 미래의 높이로 추락하는 잎이 말해주는 것
별들이 어둠을 짙게 빨아들여 점의 밀도로 태우듯 이별하는 잎들이 가장 고운 소리에 지쳐 적요가 되듯 구석인 순간, 쫓는 자의 사전거리 안에 갇히고 마는
내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제 숨이 닳아지는 줄도 모르고 벼랑 밖 허공까지 삼킨 적요의 통로는 깊고 서늘했다 양쪽 세상을 동시에 만끽하며 여전히 정지를 모르고 길들이 사라지는 비밀의 늪
나를 끌고 어디까지 가려는가
이강하 시인 / 적도의 연(鳶) - 송정박상진호수공원에서
그의 몸에 무궁화 꽃이 피고 있다 조국을 향한 혁명적 그리움,
가도 가도 채울 수 없는 사선의 허기가
붉은 행성을 돌고 있다
독립의 사슬에 부딪혀 상처가 나고 화살을 맞기도 했으나, 이는
오랫동안 마음을 비운 충혼의 가벼움이다
자유보다는 억압된 기도가 많았던 시간, 생각할수록
개인적인 직무에 열정을 쏟았던 나 아닌 나
비릿한 역사가 온갖 기형적 물빛을 뒤흔든다
끝없이 엇갈린 지난 날, 안과 밖의 전투가
연줄을 푸는 내내 울퉁불퉁하다
꽃이 피고 지는 생과 사의 무한처럼
낮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역사와 죄는
낯과 밤의 과녁을 능가할 것이라 우기고 싶겠다
호수를 건넌 연의 맥이 오목가슴 휘며 액厄을 쫓는다
점점 선명해지는 노을 속, 그날의 네가 서 있다
그의 영혼은 적도의 능선, 무궁화 꽃 만발한 영겁의 궁이 될 것이다
이강하 시인 / 맹인(盲人)
깜깜하지 않아, 나는 항상 바깥이었으니
내 바깥은 신비롭고 화창해 기차를 타고 가는 기다란 호수 같아 멀리 여행을 가고 싶어, 하고 노래 부르면 물결을 타고 오르는 싱싱한 배 한 척 그러나 완벽한 항해란 쉽지 않아 공연을 실수 없이 마치는 것처럼 목덜미를 스치는 그 무엇도 놓쳐선 안 돼
허공의 길을 더듬어 몸을 휘는 나무들 울퉁불퉁 걸음은 매초 근엄하고 신중하지 나는 슬픔을 모르는 볼록한 잎눈 어느 지팡이 미래를 연구하는 점자가 되지 어둠으로 이어지는 저녁의 길 끝, 저쪽을 훤히 열어놓고 나는 밤에도 걷지
두렵지 않아 내 몸속에는 거대한 지도가 움트고 있으니
이강하 시인 / 채석강
아주 오래 전부터 동행한 당신과 나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숨소리가 뚜렷이 국경을 넘네 절벽 너머 그 너머 아무나 신을 수 없는 태초 부족장 신발로
수천 광년을 말아 올리는 소리 수천 광년을 말아 내리는 소리에 더 단단해진 사원 못 다한 말과 행위가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기억으로부터 버림받은 통증 거부의 날은 뼈 속에서 흔들리고 절벽은 매일매일 누군가를 지켜준 수문장이었을 것이네
자근자근 밟히는 태양의 파편 섬의 신발은 문명이 두렵네 갯벌 속 침묵이 아늑히 느껴질 뿐
아주 오래 전부터 견뎌온 문장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부족장 언어가 빽빽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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