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 시인 / 홀로그래피
겨울이 복용한 가루약이 서서히 헐거워지는 새벽입니다. 크게 앓고 일어나 몸의 뒷면을 바라보면 빛으로 다 스며들지 못했던 무늬들이 떠오르는군요. 실수로 삼켜버렸던 눈보라를 생각합니다. 스스로 가지를 꺾는 번개들. 자신 안의 망령을 찾아 떠나는 여행 속의 여행. 흐르는 것이 흐르는 것을 더럽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금 간 접시 위로 돋아나던 작은 손가락들을 보았지요. 구름 위를 유영하던 흰 돌고래, 뒤늦은 감정처럼 흘러내리던 물방울과, 비둘기 날개의 다채로움도요. 하늘을 휘저었던 폭풍의 무늬가 살 아래로 드리우면, 오래 버려둔 어깨 위에 차가운 광선들이 쏟아집니다. 가루약이 빠르게 펼쳐지며 무수해지듯 우리는 깨져버린 것들이 더 영롱하다는 것을 알지요. 창문에 적어두었던 소식들이 서서히 휘발하고 세계의 한 귀퉁이가 접혀듭니다. 사랑하는 헛것들. 빛의 자격을 얻어 잠시의 굴절을 겪을 때, 반짝인다는 말은 그저 각도와 연관된 믿음에 불과해집니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부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두 눈이 마주치면 생겨나는 무한의 통로 속으로. 이미 깊숙해져 있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찾아. 떠올린다는 말에 들어 있는 일렁임을 다해서.
시집 『빛의 자격을 얻어』(문학과지성사,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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