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 / 건성건성
코로나로 집콕, 다섯 달 넘어서자 신문과 텔레비가 눈에서 멀어지고 쇼팽과 드뷔시가 한뎃 물소리 되었다. 내가 점점 버거워진다. 창으로 꽃향기가 넘어 들어와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입맛이 나간다. 모르는 새 건성건성이 집안에 자리 잡았다, 고 말하고 싶지만 뵈지는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음 둔주곡이다. 오후 두 시, 꽃에 물을 준다. 꽃의 표정도 건성건성. 마스크 꺼내 쓰고 밖으로 나간다. 후덥지근, 장마철. 아파트 단지를 두 바퀴 돌고 와도 집안의 표정이 바뀌지 않는다.
건성건성, 그 생김생김은 고장난 슬픔 닮았어. 지금 막 핀 꽃 좀 보게나! 안부 메시지 받아도 꿈쩍 않는 슬픔. 하지만 슬픔이라면 새게 할 수나 있지. 비우려 들면 들수록 더 바싹 조여들지만 참다 참다 땜질 자국 찾아내 납 조각을 떼 내면, 그만! 죽을 쓰든 엎어버리든 마음대로! 하면, 새기 시작했어.
건성건성은 소리도 빛도 땜질 자국도 없다. 기진맥진도 없다. 지금 몇 시? 세 시. 다시 보아도 세 시. 꽃병에 물을 준다. 왜 또? 하지 않고 꽃이 물을 받아 마신다. 왜 고마운지는 모르겠으나, 고맙다. 막 미소 지으려는데, 물 넘친다! 꽃에도 꽃병에도 그만 둬!가 있겠지. 손수건 꺼내 들고 탁자에 넘친 물 훔치려다 손 멈칫, 떨어진 꽃잎 하나가 흘러오는 물을 절묘하게 막고 있다. 별 볼 일 없는 꽃잎 하나가 중력의 흐름을 막고 있네. 혹시 그 물 막겠다고 미리 여기 떨어진 건 아니겠지. 떨어진 장소와 놓인 각도를 보면 그렇기도 하다. 우연의 줄 한 가닥이 휙 스치고 간 게 아니란 말이지. 아 그 잎 조금 옆에 꽃잎 또 하나 떨어져 있군. 각도 비뚤게 건성건성 놓여 있다. 후 부니 뒤집힐 듯 뒤집힐 듯 한 뼘쯤 불려가다 선다. 다시 분다. 뒤집히지 않고 반 뼘쯤 더 물러난다. 버티는구나! 가만,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 남아 있을 만하지는 않겠나.
황동규 시인 / 어떤 은유
이제 무얼 더 안다 하랴.
저 맑은 어스름 속으로 막 지워지려 하는 무릎이 안개에 걸려 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저 조그만 간이역.
안개 밖으로 잘못 얼굴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 들켜서 공중에 떠 있다.
한 줄기 철길이 숨죽이고 있다.
아 이 찰나 이 윤곽, 어떤 추억도 끼어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윤곽 모서리가 순간 예민해지고 눈 한번 감았다 뜨자 이 가벼운 지워짐!
이 가벼움을 나는 어떤 은유, 내 삶보다 더 X레이 선명한, 삶의 그릇 맑게 부신, 신선한 물음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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