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동규 시인 / 건성건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1.

황동규 시인 / 건성건성

 

 

코로나로 집콕,

다섯 달 넘어서자 신문과 텔레비가 눈에서 멀어지고

쇼팽과 드뷔시가 한뎃 물소리 되었다.

내가 점점 버거워진다.

창으로 꽃향기가 넘어 들어와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입맛이 나간다.

모르는 새 건성건성이 집안에 자리 잡았다,

고 말하고 싶지만 뵈지는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음 둔주곡이다.

오후 두 시, 꽃에 물을 준다.

꽃의 표정도 건성건성. 마스크 꺼내 쓰고 밖으로 나간다.

후덥지근, 장마철.

아파트 단지를 두 바퀴 돌고 와도

집안의 표정이 바뀌지 않는다.

 

건성건성, 그 생김생김은 고장난 슬픔 닮았어.

지금 막 핀 꽃 좀 보게나! 안부 메시지 받아도

꿈쩍 않는 슬픔.

하지만 슬픔이라면 새게 할 수나 있지.

비우려 들면 들수록 더 바싹 조여들지만

참다 참다 땜질 자국 찾아내 납 조각을 떼 내면,

그만! 죽을 쓰든 엎어버리든 마음대로! 하면,

새기 시작했어.

 

건성건성은 소리도 빛도 땜질 자국도 없다.

기진맥진도 없다.

지금 몇 시?

세 시.

다시 보아도 세 시.

꽃병에 물을 준다.

왜 또? 하지 않고 꽃이 물을 받아 마신다.

왜 고마운지는 모르겠으나, 고맙다.

막 미소 지으려는데, 물 넘친다!

꽃에도 꽃병에도 그만 둬!가 있겠지.

손수건 꺼내 들고 탁자에 넘친 물 훔치려다 손 멈칫,

떨어진 꽃잎 하나가 흘러오는 물을 절묘하게 막고 있다.

별 볼 일 없는 꽃잎 하나가 중력의 흐름을 막고 있네.

혹시 그 물 막겠다고 미리 여기 떨어진 건 아니겠지.

떨어진 장소와 놓인 각도를 보면 그렇기도 하다.

우연의 줄 한 가닥이 휙 스치고 간 게 아니란 말이지.

아 그 잎 조금 옆에 꽃잎 또 하나 떨어져 있군.

각도 비뚤게 건성건성 놓여 있다.

후 부니 뒤집힐 듯 뒤집힐 듯 한 뼘쯤 불려가다 선다.

다시 분다. 뒤집히지 않고 반 뼘쯤 더 물러난다.

버티는구나! 가만,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 남아 있을 만하지는 않겠나.

 

 


 

 

황동규 시인 / 어떤 은유

 

 

이제 무얼 더 안다 하랴.

 

저 맑은 어스름 속으로 막 지워지려 하는

무릎이 안개에 걸려 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저 조그만 간이역.

 

안개 밖으로 잘못 얼굴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

들켜서 공중에 떠 있다.

 

한 줄기 철길이 숨죽이고 있다.

 

아 이 찰나 이 윤곽, 어떤 추억도 끼어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윤곽 모서리가 순간 예민해지고

눈 한번 감았다 뜨자

이 가벼운 지워짐!

 

이 가벼움을 나는 어떤 은유,

내 삶보다 더 X레이 선명한,

삶의 그릇 맑게 부신, 신선한 물음으로

받아들인다.

 

 


 

황동규 시인(黃東奎)

1938년 평안남도 숙천(肅川) 출생.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맏아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 학사 및 석사학위 취득. 1966∼1967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 1987∼1988년 미국 뉴욕대학교 객원교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1958년 서정주(徐廷柱)에 의해 시 <시월>, <동백나무> <즐거운 편지>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 『어떤 개인 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등 11권의 시집과 산문집 『겨울 노래』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 등을 펴냄.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