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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혜미 시인 / 홀로그래피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1.

이혜미 시인 / 홀로그래피

 

 

 겨울이 복용한 가루약이 서서히 헐거워지는 새벽입니다. 크게 앓고 일어나 몸의 뒷면을 바라보면 빛으로 다 스며들지 못했던 무늬들이 떠오르는군요. 실수로 삼켜버렸던 눈보라를 생각합니다. 스스로 가지를 꺾는 번개들. 자신 안의 망령을 찾아 떠나는 여행 속의 여행. 흐르는 것이 흐르는 것을 더럽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금 간 접시 위로 돋아나던 작은 손가락들을 보았지요. 구름 위를 유영하던 흰 돌고래, 뒤늦은 감정처럼 흘러내리던 물방울과, 비둘기 날개의 다채로움도요. 하늘을 휘저었던 폭풍의 무늬가 살 아래로 드리우면, 오래 버려둔 어깨 위에 차가운 광선들이 쏟아집니다. 가루약이 빠르게 펼쳐지며 무수해지듯 우리는 깨져버린 것들이 더 영롱하다는 것을 알지요. 창문에 적어두었던 소식들이 서서히 휘발하고 세계의 한 귀퉁이가 접혀듭니다. 사랑하는 헛것들. 빛의 자격을 얻어 잠시의 굴절을 겪을 때, 반짝인다는 말은 그저 각도와 연관된 믿음에 불과해집니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부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두 눈이 마주치면 생겨나는 무한의 통로 속으로. 이미 깊숙해져 있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찾아. 떠올린다는 말에 들어 있는 일렁임을 다해서.

 

시집 『빛의 자격을 얻어』(문학과지성사, 2021) 중에서

 

 


 

이혜미 시인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창비, 2011)과 『뜻밖의 바닐라』(문학과지성사, 2016), 『빛의 자격을 얻어』(문학과지성사, 2021)가 있음.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