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은 시인 / 점박이꽃
발을 헛디뎠을까 차가 향기의 벼락 속으로 뛰어든 걸까 지품에서 진보로 넘어가는 국도변에 만삭의 노루가 앉은 듯 누워 있다
금방 어린것이 나올 듯한 황갈색 배를 꿈틀거리며 기품 있는 목은 든 채 하트 모양의 발굽 향기를 찍으며
저 순한 어미는 알까 곧 어룽이는 빛살 속에 찬 기운이 섞이고 화사한 생을 거두어갈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볼 개미가 몰려들 것을 쿡쿡 독수리가 발톱으로 찔러볼 것을
귓불 도톰한 상수리 잎도 읽지 못하는 아직 구름이 놀고 있는 가랑가랑한 눈의 호수 아지랑이의 현기증 일으키는 젖은 코 저 일렁이는 꽃시간
아무것도 모르고 까치는 날아와 발끝에 향기 찍어 상수리나무 어깨로 날아간다 건듯거리는 바람이 왜 그래, 어깰 툭툭 치며 부신 햇살에 타는 털을 오래 만진다 저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사라질 거라곤 곧 이곳을 방문할 죽음의 그림자도 생각 못할 것이다
생의 아른한 둘레가 한 획 쉼표로 편안해질 한 마리 순한 짐승이 만드는 눈의 경전 앞에 내가 지은 경계가 사정없이 무너진다
이제 곧 길 가던 농부가 저 꽃향기를 수습해갈 것이지만 저 곳의 햇살은 노루가 떴던 눈을 감는 속도로 저물어갈 것이다 둘레도 풍경도 될 수 없는 난 조각구름만도 못한 안부를 던져놓고 갈 뿐
격월간 『시사사』 20014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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