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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이레 시인 / 동물원에서 텔레비전 보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2.

문이레 시인 / 동물원에서 텔레비전 보기

우리(We)와 우리(Cage) 사이

 

 

밖은 우리의 함정이었다

 

울타리를 친다는 건 거부의 표시일까

 

아무도 침범하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게 관계망이라면 문 안쪽은 안전하다는 거겠지, 포식자가 걸어온 길엔 왜 자꾸 문이 사라지는 거니! 서로를 겪는 방식이 달라 곳곳에 우리가 필요했지 우리는,

 

우리가 있어 슬프다가도 우리가 있어서 안전하다는 생각

 

아이들과 동물원에 온 인솔교사는 호랑이보고 '귀엽다'를 난발하고

발톱을 감춘 호랑이가 원하는 게 뭔지, 이들의 뇌 속 세계

 

아무것도 모르는 해는 척, 척, 척, 돌아가고

 

어제는 아버지랑 실랑이하다가 휴지통이 날아왔지

변화구를 던지듯 심각하게 노려보던 눈

 

누군가의 내일이 여기라면

사각이 좀 더 안전한 방법이길,

 

모서리는 깎이더라도 우리의 안전이 될 수 있다는 모순!

 

매일매일 갇힌 동물처럼

어느 것 하나 '함께'라 부를 수 없는 나의 우리를

동물원 가서 묻는다, 갇힌 슬픔이 튀어나와 나를 덮칠 것 같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만이 아니라는 것

물려받은 유전자가 그렇다는 걸

 

동물은 왕국을 포기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는 우리를 훌쩍 뛰어넘지 못하는데

 

밖은 여전히 우리를 뛰쳐나간 아이들의 뒤집기가 한창이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가끔 내 눈에만 보이지만

선뜻 먹이를 주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는

 

목숨을 건

네모 속 갇힌 최악의,

 

 


 

 

문이레 시인 / 오브제

- 종탑에 걸린 너

 

 

푸른 리넨 커튼이 드리워진 창으로 십자가가 보여

 

그 속에 네가 매달려 있다는 건, 아직 내 눈이 깨어있다는 것

휘파람새의 지저귐 들리는 건, 두 귀가 열려 있다는 거겠지

 

나의 종교를 대신할 너만 있다면 오늘의 우울을 날려 보낼 거야

지금은 너의 꽃잎이 피고 있는 계절

 

빈 의자의 시간은 자꾸만 멈추질 않아

다가가 손 내밀고 싶지만

벚꽃은 더 이상 찬란하지 못해 울면서 피어나지

 

넌 사방 못질한 오동나무 붉은 관처럼 누워 있지만

너의 종교와 나의 문학이 세상의 끝이 아니길 기도해

 

단 한 번도 입 맞춘 적 없지만

그건 나의 자오선과 너의 동쪽이 조금씩 움직이기 때문일 거야

 

지구를 조금씩 돌아 그 중심을 볼 때

입술엔 너의 종교를 묻히길 바라

 

우린 우연으로 만났지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때, 꽃잎은 먹어 버리자

 

백 년 만에 돌아온 계절이 날 위해 웃어줄 때까지

봉오리마다 자붓자붓 슬픔을 꽃 피울래

 

너의 종교를 기다릴게

 

 


 

문이레 시인

1969년 대구에서 출생. 2019년 제14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 2019년《시산맥》등단. 《영남문학》 수필 등단. 제14회 동서문학 맥심상 수상. 텃밭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