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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정민 시인 / 모래바람무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2.

신정민 시인 / 모래바람무늬

 

 

아버지는 TV를 켜 놓고 주무셨다

 

끄면 영락없이 깨셨다

방송 중인 곳에 돌려놓고 다시 눈을 감으셨다

 

필요했던 소음

 

먼 옛일이 어제 일보다 분명한 아버지에게

TV는 필요한 소음을 제공하는 훌륭한 기계였다

 

재미없는 드라마도 필요했다

 

방송 끝난 화면의 소음 속에 외계에서 오는 신호가 잡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버지가 별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

 

밤하늘 자주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버릇

떠나온 고향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었는데

 

별과의 접선을 시도하는 줄도 모르고

방송 끝난 TV를 자꾸만 껐던 것이었다

 

신정민,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파란, 2019, 66~67쪽

 

 


 

 

신정민 시인 / 육촌

 

 

참나무와 나는 먼 친척간이다

 

구름이 해를 가리기만 해도 날갯짓을 멈추는 아르고스 나비와 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타원형 자취를 남기는 경단 고둥의 관계쯤 된다

 

고둥이 언제 그 자리를 지나갔는지 해의 각도를 계산할 수 있다는 생물학자와 아라비아 사막에서 오백 년 혹은 육백 년마다 새로 향나무를 쌓아 올려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향나무와의 관계쯤 된다

 

자신이 버린 것에서 살아갈 자양분을 얻는 숲, 살기 위해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과의 혈연 숲을 걷는 것이 까닭 없이 좋은 건 그래서다

 

여섯 사람만 건너 알면 우린 다 아는 사이, 졸참 갈참 졸갈참보다 조금 더 멀 뿐 볕을 향해 가지를 뻗는 피붙이 너와 나는

 

굴참나무와 양버즘나무의 관계쯤 된다

 

 


 

 

신정민 시인 / 줄타기

 

 

그는 어깨에 매달린 두 개의 떡 상자로 중심을 잡는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앙금으로 뭉쳐놓은 울음들이 흔들린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른 아슬아슬한 시장통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없는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이 상책임을 안다

그가 오를 때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아득한 발길이 그를 흔든다

누군가 떡을 사기 위해 그를 불러 세우면

기우뚱거리는 허공에 상자를 내려놓고

상자 속의 찰진 눈물을 꺼내는 그의 묘기가

숱한 경험에서 얻어낸 그만의 기술이

절정에 다다른다

일어선 허공을 다독이며 둥둥둥 걷는 그에게

피할 수 없는 관객, 햇볕이 때로는 빗줄기가

그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보내곤 하였다

끄덕끄덕 많이 흔들릴수록 많은 갈채가 쏟아졌다

그러나 시장통의 어느 누구도 그가 어떻게

그 높은 줄에서 홀로 내려오는지 본적이 없다

출렁이는 걸음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

 

 


 

 

신정민 시인 / 헝그리 복서

 

 

난 뿌리 하나가

화분 밖으로 뻗고 있어

개미농원에 들고 가

조금 더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청했더니

꽃을 보려면 놔두라 한다

비좁아서

살아보겠다 그러는 거라고

뿌리에 신경 쓰면

꽃 피우지 않을 거라고

 

 


 

 

신정민 시인 / 색깔빙고

 

 

무지개의 본질은 흑백이므로

 

회색분자들이여

무지개를 그려보자

 

그림자가 우리를 속일 수 있게

 

옷장을 열어보자

새빨간 거짓말 코트를 입어보자

말만 번지르르한 헛소리 흰색으로 칠해보자

 

알래스카의 무지개는 삼원색으로

아프리카 인디언의 무지개는 스물한 가지 색으로

 

검은 색은 현상일 뿐

검은 것 아닌 검은 색 가까이 다가가보자

가다 만난 회색으로

흰 것 아닌 흰 색 멀리 도망쳐보자

도망치다 만난 회색으로 무지개를 칠해보자

 

모든 색을 다 쥐고 있는 태양

 

바다가 갖지 못한 푸른 색으로

빨간색만 빼고 나머지 색을 다 감춰버린 원숭이의 엉덩이를

익어버린 망고가 내놓지 않는 노란색으로

 

흑과 백 사이에 걸쳐있는 무지개를 그려보자

 

싸우는 자들의 본색이 드러나게

 

컬러는 일탈일 뿐

그러니 회색분자들이여 무지개를 그려보자

 

 


 

 

신정민 시인 / Time Zone

 

 

장미 한 다발에 30분을 지불하고 집으로 가는  마지막 전철을 탄다

밤새도록 시들 줄 아는 꽃들이란 얼마나 영약한가 주급으로 받은

4시간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째깍거린다 독주없이 취해버린 어둠은

하이힐을 신은 거리의 여자와 밀회를 꿈꾼다 무산되기 직전까지

 

달리는 옷가게들 저녁을 훔쳐 뛰어가는 강도들 그 뒤를 쫓는 날렵한

그림자 따위는 애초에 없다 늙지 않는 부자들을 위해 사람들은 죽어

가고 시간 지급기 앞에서의 노숙은 매혈소의 사내들보다 쓸쓸하다

물가는 오르고 한 끼 빵을 사는데 필요한 7분이 없을 때

 

우리는 절벽에 오른다 오를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다면 불빛 환한 상점들

타임 존에 채워지고 있는 시간들 소리 없는 겨울이 추위를 놓친 건

시들지 않는 태양 때문 물고기들의 회귀 때문 죽은 나뭇가지에서 태어나는

시간은 내가 갚지 못한 외로움 때문

 

아주 먼 옛날 혹등고래였던 나는 커다란 가슴지느러미를 가졌던 나는

그후 한 때 상어의 날카로운 이빨이기도 했었다 그 이후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린 죄로 지금에 이르렀다 태어나면서 움직이는 노루와 토끼와

캥거루보다 못한 오랫동안 너의 곁에 머물며 순간들을 축내는

 

시간의 밀매가 성행하는 이 거리에선 꽃집도 빵집도 이름이 없고

기습적인 피곤만이 무서울 때 나는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의 생일을 위해 이름 없는 꽃집에서

산 장미 한 다발이 빈 술병에서 피어난다

 

 


 

신정민 시인

1961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2003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꽃들이 딸꾹』(애지, 2008), 『뱀이 된 피아노』가 있음.『작가와 사회』 편집장 역임.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