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희 시인 / 구름교차로
노가리길과 은쟁이마을 지나 당신은 그쪽으로 흘러가요 난 이쪽으로 흐르지요
포도나무들은 포도를 매달고 물구나무 선 자세로 스쳐가겠지요 보랏빛 알알이 들여다보지 말아요 발목이 잡힐 테니까
바다를 만나면 안개로 풀어져요 달려오는 파도가 포옹하기 전에 한없이 무거워져 빗방울로 흩날려도 좋겠지요
바다를 만나러 가는 당신과 바다를 만나고 오는 당신은 전혀 새로운 구름
당신과 내가 다시 만날 때 천둥으로 팡파레 울립시다 우리 처음 만나는 거니까
신호등이야 지상의 일 붉디붉은 하늘 업고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박설희 시인 / 먼나무
바로 코 앞에 있는데 먼나무 뭔 나무야 물으면 먼나무 쓰다듬어 봐도 먼나무 끼리끼리 연리지를 이루면 더 먼나무 먼나무가 있는 뜰은 먼뜰 그 뜰을 흐르는 먼내 울울창창 무리지어서 먼나무 창에 흐르는 빗물을 따라 내 속을 흘러만 가는 끝끝내 먼나무
박설희 시인 / 한때 비
뿌리내린 곳에서 수백 년을 사는 나무 걸어다니는 평생이라고 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발이 몸을 끌고 다닌다고 해서 나뭇가지처럼 중력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닌 걸
늘 휘도는 바람 덜컹거리는 유리창, 뒤틀린 문짝, 금간 벽 한때 파도, 한때 나무, 한때 암석 그리고 모든 것이 한때 비
삶의 피로가 발기슭을 넘실거릴 때 뒤늦게 도착한 카페는 이미 문을 닫고 빗속을 사이렌 울리며 달려가는 불자동차 질주하는 헤드라이트 향해 다가서는 취객
무모함이 비겁을 들이받고 그 뒤를 추돌하는 회한, 그리고 다시 추돌……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마음의 로드킬
우린 매일 위급하지만
한때 비 표면을 적시고 스며들어 누군가의 빈 내장을 달려본 적이 있으므로 구름으로 흘러다닌 적이 있으므로
아낌없이 투.신.하.는. 지상의 나날
박설희 시인 / 체
엿기름을 걸러내어 식혜를 만든다 섣달그믐 집 밖에 체를 걸어두는 풍습 호기심 많은 귀신이 구멍 세다가 날 샌다는 옛이야기, 한동안 혼자 쿡쿡 웃다가
뽀얀 물 속 떠오르는 여자 처녀로 죽은 원혼 막으려 얼굴에 체가 씌워져 있다 그 구멍마다 바늘 촘촘히 박힌 채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길거리에 묻혔다
발 디딜 때마다 밟히던 그녀 통로를 찾다가 끝없이 구멍만 세다가 가벼워지고 투명해진 그녀
다가갈 수 없네 다가올 수 없네 주술처럼 그대와 나를 분리시키네 나는 이쪽에서 덜그럭거리고 그대는 저쪽에서 부스러져 내리고
체가 확대된다 나무 자라고 새 날아가고 강물 출렁거린다 그 너머 흐릿한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것들 눈과 귀 어두운 나 적막한 풍경에 귀 대어본다 체의 안쪽을 기웃거린다
달디단 식혜 기다리는 사이 창밖에 깃털 같은 것이 흩날린다 누군가 체를 치는지 하나하나의 문을 통과해 쏟아져 내리는 눈발의 곱디고운 아우성
박설희 시인 / 빗방울 속에 갇혀
어둠으로 빚어진 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내가 덩그마니 담긴 방은 어느새 빗방울 속에 갇힌다 데굴데굴 굴러가다 번개에 부서지고 천둥 소리에 갈라진다 각각의 빗방울 속에 갇힌 내가 편의점과 비디오 가게, 약국을 지나는데 밑에 깔린 내 위로 또 다른 내가 덮치고, 달아나는 내 뒤를 또 하나의 내가 뒤쫓아 간다 엎치락뒤치락, 일부는 배수구로 빠져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고 일부는 보도경계석을 따라 줄곧 달리기만 하고…… 시시각각 표정을 잡아내는 번갯불 찌그러진 귀, 소리를 물고 있는 입, 안으로 말린 손가락, 하수구에서 퐁퐁 솟구쳐 나온 내가 방향을 모르고 치달리다, 막다른 데에 몰려 벽을 타고 기어오르다 힘없이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르다 떨어져, 빙빙 맴을 돈다 내가 몰고 온 종잇조각과 깡통과 작은 알갱이들이 원을 그린다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거품을 물며 틈을 더듬는다 벽이 만나는 모서리, 뿌리와 흙, 볼트와 너트, 용접된 쇠와 쇠…… 틈마다 촉수를 뻗는다 계속 밀려드는 수많은 내가 세게 좀더 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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