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희 시인 / 간결한 자세
하늘이 맑아 한바탕 잘 울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옆구리를 찔린 난간이 드러났다 비로소 난간의 방치된 만큼 공손해진 그늘을 본다
가계부에서 해석할 수 없는 슬픔의 구석을 지우고 밤과 낮의 궤도를 돌아온 뒷걸음의 목록을 다시 쓴다
사거리에서 몇 십 년째 목격자의 행방을 묻는 바람은 여전히 흩어지는 플래카드의 윤곽을 붙잡는다 수직으로 움직이는 편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들의 세상은 오른쪽과 왼쪽을 조율한다
오른쪽을 맞추면 왼쪽이 왼쪽을 맞추면 오른쪽이 문득문득, 운다
정선희 시집<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정선희 시인 / 울음의 목록
운다 허공이 내가 허공을 향해 운다, 운다는 것은 날마다 허공을 만나는 것이다
알을 품는둥지의 까치를 관찰하거나 신호등 위 마침표를 찍던 저녁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때 요란하게 구급차를 지날 때 눈물이 차오르는 까닭을 모를 때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드는 나와 똑같은 한 사람을 기다리고,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을 때
운다 울음을 통해 회복되는 것들이 있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2020. 상상인
정선희 시인 / 어항을 버렸을 뿐입니다
창가의 어항을 버리는 일은 쓰레기통에 꽃을 버리는 것과는 다른 기분
미끄덩한 파닥임이 남은 손가락도 버리고 싶었다 비린내가 비누로 옮겨가서 며칠을 더 파닥인다
아무 일도 없었으므로 점심을 먹는다 단지 그것뿐 너무 고요해져서 세상이 심심하다는 것 버려진 기포기에서 아침마다 햇살이 핀다 진공의 물살을 헤엄치던 물고기가 수돗물을 틀 때마다 컵에 가득 파닥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비린내가 창문을 드나든다
눈길이 자주 머물던 그 자리에 봄을 채운다, 바이올렛, 카랑코에, 베들레헴
기포가 터지면 나지막이 꽃냄새가 난다
문득 깨어보니 반짝이는 비늘 옷을 입고 있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2020. 상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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