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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선희 시인 / 간결한 자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4.

정선희 시인 / 간결한 자세

 

 

하늘이 맑아 한바탕 잘 울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옆구리를 찔린 난간이 드러났다

비로소 난간의 방치된 만큼 공손해진 그늘을 본다

 

가계부에서 해석할 수 없는 슬픔의 구석을 지우고

밤과 낮의 궤도를 돌아온 뒷걸음의 목록을 다시 쓴다

 

사거리에서 몇 십 년째 목격자의 행방을 묻는 바람은

여전히 흩어지는 플래카드의 윤곽을 붙잡는다

수직으로 움직이는 편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들의 세상은 오른쪽과 왼쪽을 조율한다

 

오른쪽을 맞추면 왼쪽이 왼쪽을 맞추면 오른쪽이

문득문득, 운다

 

정선희 시집<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정선희 시인 / 울음의 목록

 

 

운다 허공이

내가 허공을 향해

운다, 운다는 것은 날마다 허공을 만나는 것이다

 

알을 품는둥지의 까치를 관찰하거나

신호등 위 마침표를 찍던 저녁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때

요란하게 구급차를 지날 때

눈물이 차오르는 까닭을 모를 때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드는 나와 똑같은 한 사람을

기다리고,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을 때

 

운다

울음을 통해 회복되는 것들이 있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2020. 상상인

 

 


 

 

정선희 시인 / 어항을 버렸을 뿐입니다

 

 

창가의 어항을 버리는 일은

쓰레기통에 꽃을 버리는 것과는 다른 기분

 

미끄덩한 파닥임이 남은 손가락도 버리고 싶었다

비린내가 비누로 옮겨가서 며칠을 더 파닥인다

 

아무 일도 없었으므로 점심을 먹는다

단지 그것뿐

너무 고요해져서 세상이 심심하다는 것

버려진 기포기에서 아침마다 햇살이 핀다

진공의 물살을 헤엄치던 물고기가

수돗물을 틀 때마다 컵에 가득 파닥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비린내가

창문을 드나든다

 

눈길이 자주 머물던 그 자리에

봄을 채운다, 바이올렛, 카랑코에, 베들레헴

 

기포가 터지면 나지막이 꽃냄새가 난다

 

문득 깨어보니

반짝이는 비늘 옷을 입고 있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2020. 상상인

 

 


 

정선희 시인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1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푸른 빛이 걸어왔다』(시와표현, 2016)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