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철 시인 / 해삼위(海參崴)
금각만(金角灣)에 앉아 편지를 읽는다
라이터를 켜는데 두꺼운 외투의 단추를 따라 등이 켜진다
아이훈의 필체를 너는 여간 닮았다
길은 얼어도 항은 얼지 않고 빛은 유빙을 타고
여하(如何)한가 어둠은 물와 뭍의 몸을 바꾸는데
배는 바다의 배를 가르며 청어 가시 같은 유성우를 쏟아낸다
사선의 힘으로 맨몸을 훑는다
동방을 정복하라 남쪽은 낮고 축축하니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풍경처럼
마음은 먼저 얼어버렸는데
시베리아로 열차는 떠난다
오랑캐가 죽은 아비의 이름을 말갈기에 묶어 보내고
초원에 누워 돌을 안고 통곡하듯
전형철 시인 / 당신의 북쪽
운명을 조판하는 사람이 빙하구혈 속에서 반짝인다
고요가 잠시 몸을 떨었으니 다음의 고요는 고요가 아니다
지난 것들을 떠올리는 일은 사건을 목격한 벙어리의 증언 같은 것
저녁을 발굴하다 우연을 떠올리는 시간 새들은 숲을 태워 한 줌의 재를 만든다
공중에 흩날리는 살점들 사람은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눕는다
백야의 간빙기 같은 오로라는 하늘구멍 속으로 빨려든다
당신의 나침반이 어제처럼
전형철 시인 / 31일
죽음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유령들이 있다
청진기 너머 들려오는 맥박이 환자를 문진(問診)하는 것보다 진실하다던 의사의 말
어떤 적의가 있었을까 피타고라스는 정수를 의심하던 제자를 암살해 물속으로 던져 주었다
판단은 기호를 만들지만 기호는 불가역적이다
어제는 오늘이 아니고 오늘은 어제가 아닌데 그제의 숙취와 오늘의 이별에 대해 오해하는 동안 핏줄 속으로 시간의 심장이 잘려 나간다
지난 달력을 뜯어내려다 숫자 위에 손가락을 대 본다
전형철 시인 / 기네스
혁명은 손끝으로부터 비롯되는 일 빈 잔 너머 깜박이던 피뢰침의 알전구를 타진하는 일 떠나간 옛 애인의 허리를 버즘나무 가로수를 안고 기억하는 일 불면의 밤마다 감은 눈동자에 맺히는 별자리를 헤아리는 일 덧니 난 입속을 유영하는 축축한 혀를 거두는 일 그립다는 촉수 같은 것은 스스로 잘라 내는 일 성급한 고백은 납작한 표정으로 숨기는 일 저주의 주둥이에 납덩이 추를 달고 낚시하는 일 고통을 빚진 자를 찾아 신음하게 하는 일 작은 죄는 더 큰 죄로 경신하는 일 무한 수렴되는 신전의 기둥 외다리로 서 있다 투신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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