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시인 / 위독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또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현대시 13집>(1967)-
이승훈 시인 / 철학
올 겨울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진눈깨비 치던 오전 난 택시를 타고 공항터미널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제주에서 제주대 대학원 박사 논문 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 옆에 앉고 그는 50대로 보이는 남자 공항 터미널로 가면서 그가 힐끗힐끗 곁눈으로 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은 무얼하십니까? 난 검은 바바리를 걸치고 낡은 밤색 가방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글쎄 뭐 하는 사람 같아요? 그랬더니 기사 왈 철학하는 사람 같군요! 네? 철학이요? 왜 있잖아요? 풍수도 보고 예언도 하는 철학 말입니다 진눈깨비 치던 겨울 오전이었다
<현대문학> 2004년 10월호
이승훈 시인 / 망할놈의 시
용기도 없고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다 눈도 없고 코도 없다 밑빠진 나날 입도 없다 입도 없다 아아 사랑했던 너의 얼굴도 없고 기차도 없고 다리도 없고 건너야 할 다리도 없고 오늘도 없다 오늘도 없는 것들을 위하여 시를 쓴다 시를 어떻게 쓰나 망할놈의 시를 쓸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없는 얼굴이 나를 감싸면 없는 해가 생기고 없는 풀이 생기고 없는 시가 생길 테니까 없는 내가 마침내 없는 기차를 타고 없는 너를 찾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걸 믿고 살아온 게 말짱 애들 장난 같고 그런 걸 믿고 살아온 게 망할놈의 시 시 같다!
- 시집『환상이라는 이름의 역』(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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