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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부 시인 / 노고단에 여시비 내리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3.

이성부 시인 / 노고단에 여시비 내리니

 

 

노고단에 여시비가 내리니 산길 풀잎마다

옛적 어머니 웃음 빛 담은 것들 온통 살아 일어나 나를 반긴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꾸중 듣고 고개만 숙이시더니

부엌 한 구석 뒷모습

흐느껴 눈물만 감추시더니

오늘은 돌아가신 지 삼십여 년 만에 뵙는 어머니 웃음 빛

이리 환하게 풀꽃으로 피어 나를 또 울리느니!

 

 


 

 

이성부 시인 / 빈山 뒤에 두고

 

 

찬바람 벌판 어둠 끝에서

혼자 걸어오시던 이.

한 마리 학처럼 목이 길게

느릿느릿 걸어오시던 이.

 

그 큰 두팔로

이 고장 사람들의 슬픔을 껴안으며

이 고장 사람들의

희망을 어루만지던 이.

 

넓은 가슴으로 어깨로

이 고장 사람들과 함께 승리했던 이.

저 들판 적시는 영산강만큼이나

넘치는 사랑 그 안에 담고 있던 이.

 

오늘은 근심걱정 다 마감하고

훌훌 손 털고

 

다시 그 벌판 혼자서 걸어가시네

빈山 뒤에 두고 가시네.

 

 


 

이성부 시인(李盛夫, 1942.1.22 ~ 2012.2.28)

1942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백주〉와 〈열차〉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 산 뒤에 두고』, 『야간 산행』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제18회 공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