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 / 슬픔이라는 구석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야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생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이병률 시인 / 장도열차
ㅡ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한다. 며칠 동안 열차를 타야하는 대륙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홈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 2003
이병률 시인 / 고욤나무
폭포 내려오는 길에 거대한 나무 하나 넘어져 있다
오르는 길에는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본다
아마도 어젯밤 일이었을 것이다 하도 오랜만에 비 내려 그 비를 반가워하다 발을 접질렀을 것이다
밑동이 한 바퀴 휜 것을 보니 어느 쪽으로 넘어질 것인가를 고민했던 상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 오르내리는 길 모른 체하고 개울 쪽으로 누워 스스로 집이며 몸이며 經인 사랑을 염하고 있다
밑둥치에서 놀던 벌레들은 얼마나 놀랬을꼬 얼마를 놀라 얼마를 기어 달아났을꼬 넘어지는 큰 나무를 몇 개 가지로 받아내던 이웃 나무는 가지를 잃고 얼매나 흔들렸을꼬
어루만져주고 싶어 명치가 어디께인지를 더듬다 뽑혀나간 손톱을 본다 사력을 다해 허공이라도 잡으려 뻗었다가 빠졌을 손톱 소리 쟁쟁하다
폭포 내려오는 길에 넘어진 큰 나무가 개울물에 배를 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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