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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병률 시인 / 슬픔이라는 구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3.

이병률 시인 / 슬픔이라는 구석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야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생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이병률 시인 / 장도열차

 

 

            ㅡ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한다.

              며칠 동안 열차를 타야하는 대륙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홈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 2003

 

 


 

 

이병률 시인 / 고욤나무

 

 

폭포 내려오는 길에 거대한 나무 하나 넘어져 있다

 

오르는 길에는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본다

 

아마도 어젯밤 일이었을 것이다 하도 오랜만에 비 내려 그 비를 반가워하다 발을 접질렀을 것이다

 

밑동이 한 바퀴 휜 것을 보니 어느 쪽으로 넘어질 것인가를 고민했던 상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 오르내리는 길 모른 체하고 개울 쪽으로 누워 스스로 집이며 몸이며 經인 사랑을 염하고 있다

 

밑둥치에서 놀던 벌레들은 얼마나 놀랬을꼬 얼마를 놀라 얼마를 기어 달아났을꼬 넘어지는 큰 나무를 몇 개 가지로 받아내던 이웃 나무는 가지를 잃고 얼매나 흔들렸을꼬

 

어루만져주고 싶어 명치가 어디께인지를 더듬다 뽑혀나간 손톱을 본다 사력을 다해 허공이라도 잡으려 뻗었다가 빠졌을 손톱 소리 쟁쟁하다

 

폭포 내려오는 길에 넘어진 큰 나무가 개울물에 배를 띄우고 있다

 

 


 

이병률 시인, 방송작가

1967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문학동네, 2003)와 『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 그리고 『찬란』(문학과지성사, 2010)이 있음. 2018. 제6회 발견문학상.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 MBC라디오 이소라의 FM 음악도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