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인 시인 / 밥풀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을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 이 저녁의 아픈 모서리에 밥풀이 하나 있네 눈물처럼 마르고 싶은 밥풀이 하나 있네 가슴을 문지르다 문지르다 마른 밥풀이 하나 있네 저 혼자 울다 웅크린 밥풀이 하나 있네
이기인 시인 / 앵무
앵무는 몇 개의 단어로 하루치 버릇을 벗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 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말을 버리고 소리를 배우는 조롱 속에서 머리를 가슴에 수수께끼를 모이통에 넣어주듯이 오랫동안 가르치지 않는 말을 쏟아놓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 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농담을 이어 붙이는 앵무가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진짜로 안녕하세요 사라지는 느낌도 안녕하세요 안녕은 두 마리로 갈라지는 농담이야
이기인 시인 / 시인에게 온 편지
청송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밥풀냄새가 난다 그쪽도 내 독자다 지금은 봄이군요 그리고 아무 말도 없다 새순이 돋아서 좋다 꽃이 피어서 좋다 그쪽도 어쩌다 내 쪽으로 가지를 뻗어서 좋다 검열한 편지지 속에서 삐뚤삐뚤 피어난 꽃 볼펜 한 자루에서 피어났다 오늘은 저녁 쌀 씻다 한 줌 쌀을 더 씻다
이기인 시인 / 붓자국
비단에 먹이라는 옛 그림을 한 점 사귀었다 나룻배가 긴 강물 위로 먹먹하게 흘러가는 그림 한 폭 사공은 강물에 무얼 빠뜨렸는지 노젓기를 멈추고 강물을 그윽이 보고 있다 사공도 처음엔 그들처럼 무시되었던 풍경이었으리라 시간이 흘러서 피어나는 풍경이 있으리라 지워진 풍경이 물 위로 뜨는 풍경이 있으리라 풍덩! 한평생 강물 소리를 듣는 사공의 가슴엔 먹먹한 빛이 지금 강물보다 깊다 한 획 붓질의 노동이 건너야 할 강물을 휘젓고 있다
이기인 시인 / 쉬고 있는 사람들
쉬고 있는 사람들 뒤에서 나는 본다, 쉬지 않는 땀의 열기를 그것은 뜨거운 심장에 뿌리를 둔 꽃이 하늘을 향해서 열린 것처럼 아름답게 흔들리는 모습이다 그래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뒤에서 바라보는 일은 나를 마구 흔드는 일이다 내가 그들로 인해서 흔들리는 것은 내 심장이 더 쿵쿵 뛰는 것을 동시에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쉬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도 짐을 지고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살아있는 꽃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를 맡으면서 나는 함께 흔들린다 나는 방금 쉬고 있는 사람들 뒤에서 그들의 앞으로도 나아가고 싶다 나는 방금 쉬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궁금한 그들의 뒤로도 가고 싶다 그 사이에 인연이 닿은 바람이 와서 살아있는 꽃들을 살아있으라고 앞뒤로 흔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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